< M라운지 >"100세 前 멋진 영화 꼭 남기고 싶어.. 인생 마무리는 다 베풀고 아름답게"

박현수 기자 2021. 6. 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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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대총동창회 주최 제23회 ‘관악대상’ 시상식장에서 포즈를 취한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그는 이날 출세작 ‘빨간 마후라’를 의식한 듯 빨간 넥타이를 매고, 빨간 행커치프를 꽂고 행사장에 나타나 서울대 후배 배우 이순재 씨 등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김선규 기자

‘관악대상’수상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두 살 어린 이스트우드도 현역

내 노년의 정점 찍을 작품 원해

예술 발전 위해 수백억대 기부

봉준호 감독도 대학생때 지원

韓영화 세계서 극찬 받아 보람

앞으로 더 좋은 작품 쏟아질 것

규칙적 생활·걷기로 건강관리

긍정·감사하는 마음이 불로초

“건강 관리를 잘해서 100세 전에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노인과 바다’ 같은 멋진 영화 한 편 꼭 남기고 싶습니다.”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대총동창회 정기총회에서 한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23회 ‘관악대상’을 수상한 한국 영화계의 거목(巨木) 신영균(93)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그는 시상식 후 문화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꼭 하나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년의 정점을 찍을 작품이었으면 한다”며 “나보다 두 살 어린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영원한 현역으로 뛰고 있다”고 덧붙였다.

배우인생 75년, 영화인생 61년을 맞은 그는 이날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나.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주면 된다”라며 우렁찬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말했다. 그는 이어 “중학교 때부터 연기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대학도 가지 않고 연극배우를 하다 보니 생계가 보장되지 않아 대학을 가기로 결심, 서울대 치과대학을 진학했다. 졸업 후 치과병원을 개업해 먹고살 만하니까 또 배우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내에게 배우를 하겠다고 하자 ‘내가 치과의사랑 결혼했지, 딴따라하고 결혼한 게 아니다’며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했다. 그래서 “딱 한 편만 해 보고 성공하지 못하면 그만두겠다, 배우 하더라도 스캔들은 절대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야 겨우 허락을 받아 연기 인생을 시작한 것이 현재에 이르게 됐으며 숱한 유혹에도 그때 한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4관왕, 지난 4월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등 영화계 경사에 대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았다.

“한국영화가 세계로부터 극찬받은 데 대해 큰 보람을 느낀다. 2019년 한국 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했다. 내 나이가 90을 넘었으니 영화 역사와 함께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2011년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만들어서 영화연극인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단편 영화 창작 지원 등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봉준호 감독도 연세대에 다닐 때 1994년 ‘백색인’이라는 작품으로 신영청소년영화제 장려상을 받아 지원했다. 봉 감독은 그 작품이 영화감독의 길을 열어준 시발점이라며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윤여정 씨는 그동안 고생한 것에 보상을 받은 것 같다.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를 잘했는데 그간 기회가 없었다. 우리 영화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건 1960년대부터 충무로에서 다지고 다져서 뿌리가 튼튼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기대하시면 더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올 것이다.”

신 명예회장은 1999년에 사재 100여억 원을 들여 국내 최초이자 최대 영화박물관인 제주신영영화박물관을 개관했다. 특히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발전을 위해 500억 원 상당의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과 제주신영영화박물관을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했다. 2013년에도 서울대에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해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06년 금혼식을 번듯하게 하려고 예약까지 다 했다가 그 비용 1억 원을 한국복지재단 등 구호단체에 기부했는가 하면,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에도 기금을 기부해 운영해오고 있다. ‘신영균 탈북민 장학사업’이다. 탈북 학생 및 제3국에서 출생한 탈북민 자녀들의 학업과 생활을 후원하고 있다. 나머지 재산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지난해 10월 ‘빨간 마후라 신영균의 엔딩 크레딧’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후회 없이 살았다’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신상옥 감독이 신영균에게 붙여줬다는 별명이 눈길을 끌었다. 이른바 ‘수도꼭지’다. ‘우는 장면에서 열 번 NG가 나서 다시 찍어도 열 번을 모두 진짜 울기 때문에 붙여준 별명’이라고 했다. 이 별명에 대해 그는 “무뚝뚝한 신 감독치고는 최고의 칭찬이었다”고 회고했다.

신 명예회장은 신상옥 감독에 대해 부인 최은희보다 영화를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신 감독 앞에서 배우 최은희와 입술이 맞닿는 연기를 하느라 진땀을 뺐던 일화도 소개했다. “‘강화도령’ 막바지 대목의 최 씨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내가 입안에 물 한 모금을 넣어 다 죽어가는 그에게 먹이려고 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인 신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지켜보고 있으니 어쩐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정면으로 포갤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약간 비뚤어지게 고개를 돌리면, 신 감독은 어김없이 컷을 외쳤다. ‘물을 입속에 넣어야지 왜 옆에 흘리나. 제대로 해!’ 신 감독이 다그쳐서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신 감독은 사랑하는 부인보다 영화를 더 우위에 두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언급도 관심을 모았다. 그는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민주공화당 영입으로 제9대 총선에서 서울 영등포을에 출마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정치자금법이 없어서 ‘돈 선거’가 횡행했어요. ‘돈이 그렇게 많은 양반이 겨우 쌀 한 가마니 갖고 표를 달라니요’라며 인기 배우에 재력가인 나에게 거는 유권자들의 기대치가 예상보다 높았어요. 선거 운동하다 정치는 할 게 아닌 것 같아 도중에 ‘병원 입원’을 구실로 그만뒀어요.”

13대 총선에서도 고위권력층에서 출마를 권유, 등 떠밀려 출마했다가 큰돈을 쓰고 1627표 차로 낙선했다.

“당시 지역구에 아들 집이 있었어요. 유세 도중 잠깐 쉬기 위해 아들 집에 다녀 왔는데 ‘세컨드 집에서 나왔다’고 모략을 해서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로 저를 불렀어요. ‘문화예술계 발전을 위해 정치를 한번 해보자’는 권유로 15대 국회에서 신한국당 비례대표로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요.”

4년 후 새로 창당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특보단장을 하면서 16대 국회에서도 비례대표로 활동하며 문화예술계 지원과 발전을 위한 입법을 주도했다.

신 명예회장은 “국회의원은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큰 뜻을 품어야만 고난과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 정치하는 사람은 자신이 물러날 때를 잘 알아야 한다”며 2004년 총선 불출마 및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우리나라 정치가 늘 혼탁한 모습을 보여 국민의 신뢰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며 “선배 정치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우리 나이 94세지만 무척 건강해 보였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며, 건강 비결은 뭘까. “긍정적인 사고와 감사하는 태도가 진정한 불로초가 아닐까 싶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규칙적인 생활과 매일 5000보 걷기”도 강조했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자리에 든다. 오전 10시면 명동 사무실로 출근한다”고 말했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담배를 평생 멀리한 것도 건강 유지의 핵심이라고 알려준다. “매일 아내가 끓여 준 콩국을 마시고, 조미료를 최소화한 메뉴로 소식하는 것도 비결”이라고 밝혔다. “운동은 매일 오후 3시 헬스클럽에서 근육운동과 러닝머신을 두어 시간 하고, 가끔 필드에 나가 골프를 하기도 하는데 실수하지 않으면 보기 플레이로 80대 후반 타수가 나온다”고 했다.

신 명예회장은 성공의 비결을 꼽아달라고 하자 ‘신앙과 노력’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어머니의 기도와 아내의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촬영장에서 죽으면 영광이다’라는 각오로 배우 활동을 한 것도 두 여인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힘줘 말했다. 이와 함께 ‘노력하는 인간’은 자신의 삶을 꿰는 키워드라고 했다. “남들보다 특별히 잘난 것도, 뛰어난 것도 없지만 노력 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했다.

끝으로 후배들을 위해 조언 한마디를 남겨 달라는 말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밝혔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를 선택했다. 벌이가 좋았던 치과의사만 계속 이어갔더라면 지금의 신영균은 없었을 것”이라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박현수 인물팀장 phs2000@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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