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만에 英여왕 다시 만난 바이든, 고개 숙이지 않은 까닭은
13일 오후(현지 시각) 영국 윈저성에 검은 레인지로버 차량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검은 선글라스를 낀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하늘색 정장을 입은 부인 질 바이든 여사였다. 유럽 순방 중인 바이든 부부가 영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만나기 위해 여왕의 거처를 찾은 것이다. 바이든 부부는 의장대를 사열하고 영국과 미국 양국의 국가 연주도 들었다. 이어 분홍색 모자와 원피스 차림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애프터눈 티(오후의 홍차)’를 들기 위해 윈저성 안으로 들어갔다.
바이든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났을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았는데, CNN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던 모친의 조언을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아일랜드는 약 800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영국의 수탈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한 아일랜드인이 많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이 1982년 상원의원 신분으로 처음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나게 됐을 때, 모친이 “여왕에게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약 40분간의 면담이 끝난 뒤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이 “어머니를 연상시켰다”고 했다. 78세의 바이든 대통령은 95세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해 “기분 나빠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용모와 너그러움이 내 어머니를 연상시켰다”고 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주 자애로웠다(gracious)”면서 “우리는 아주 좋은 대화를 했다”고 말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났을 때 즉각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것을 두고 영국에서는 ‘의전 실수’란 지적이 나왔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두 정상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한 사람은 내가 곧 만날 푸틴이고, 또 시진핑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해서 우리는 아주 긴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 대해 물어봤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는 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푸틴 대통령과 미·러 정상회담을 하는 것으로 유럽 순방을 마칠 예정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 입헌군주제의 전통에 따라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견 표명을 극도로 피해왔다. 그러나 공주 시절인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보급부대 소위로 참전까지 했던 만큼, 국제 정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중·러의 도전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시각과 정책에 대해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또 “백악관에서 사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는데,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이 “이 (윈저성) 뜰에 백악관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윈저성은 넓은 반면, 백악관은 그만큼 넓지 않다는 의미로 보인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느냐는 물음에 바이든 대통령은 “그렇다”고 답했다. 헤어짐이 아쉬워 자신이 “더 오래 있고 싶다. 몇 분쯤 차를 잡아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외국 정상이 영국 여왕과 나눈 대화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바이든 대통령이 13번째 직접 만난 미국 대통령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951년 공주 신분으로 처음 워싱턴DC를 방문해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을 만났고, 최근 14명의 미국 대통령 중 린든 존슨 대통령을 제외한 다른 대통령들을 모두 만난 적 있다. 이번 바이든 대통령과의 만남은 지난 4월 남편 필립공이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처음 갖는 외국 정상 접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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