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들의 끈끈이와 능력주의 [이용균의 베이스볼 라운지]

이용균 기자 2021. 6. 1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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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뉴욕 양키스 투수 게릿 콜은 지난 9일 화상 기자회견에서 ‘마운드에서 스파이더 택을 쓴 적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콜은 당황한 듯 “솔직히, 지금 정확히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약 15초 동안 뜸을 들인 뒤 “야구에는 선배가 후배에게,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관습 같은 것이 있다. 그중에는 울타리를 넘어선 것들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콜은 “선수와 팬들, 팀 등 야구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고, 메이저리그가 이 문제에 대해 엄격하게 규제하려 한다면, 우리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스파이더 택’은, 힘 자랑 대회에서 돌멩이 들 때 쓰는 끈끈이. ‘관습’이라고 하는 것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공에 끈끈한 이물질을 발라 던지는 것을 뜻한다. 리그에서 가장 비싼 돈을 받는 투수의 구구절절하고 장황한 답변에 팬들의 반응은 이렇다. “응, 너도 끈끈이 발랐네, 발랐어.”

야구규칙 6.02 C의 (4)는 투수의 금지사항으로 ‘공에 이물질을 바르는 것’을 규정했다. 공에 뭔가를 바르면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오랫동안, 콜에 따르면 선배가 후배에게 ‘비법’을 전수하는 방식으로 공에 ‘끈끈이’를 발라왔다는 것이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공의 변화는 1920년 레이 채프먼 사망사고로부터 비롯됐다. 채프먼은 공에 이것저것 묻혀서 던지던 시대, 투수의 손에서 미끄러진 데다, 지저분해서 잘 안 보이는 공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사망했다.

비극적인 사고 이후 메이저리그는 타자가 공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색을 유지하면서도 투수들의 그립감을 높이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1930년대 특별한 진흙이 발견됐다. 검지 끝으로 찍어 올리는 양으로도 공 전체에 펴 바를 수 있었다. 색은 유지되고, 그립감은 좋아졌다. 1950년대가 되면 모든 구단들이 공에 ‘마법 진흙’이라 불리는 흙을 골고루 묻혀 썼다.

투수들이 끈끈이를 쓰는 것은 어차피 공에 ‘마법 진흙’을 바르기 때문이다. 미끄러지면 타자가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것도 ‘규칙 위반’의 죄책감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다. 너도 나도 쓰기 때문에 발라도 된다는 ‘공감대’가 이뤄졌다. 디애슬레틱이 지난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 결과 메이저리그 투수의 약 4분의 3이 끈끈이를 썼고, 인터뷰 대상 중 5명은 ‘100% 쓴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최소 6개 구단은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이용한 특수 물질을 제조해서 사용했다.

메이저리그는 이제서야 ‘규칙 적용 강화’를 들고 나왔다. 경기 중 의심 가는 공을 수거해서 조사하겠다고 했다. 투수의 모자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심판이 모자 교체를 지시하는 일도 나왔다. 지저분한 모자로 유명한 클레이턴 커쇼도 요즘 깨끗한 새 모자를 쓰고 던진다.

관습적으로, 누구나 해 오던 일이라는 것이 규칙 위반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이전 세대들에게 위장전입은 ‘교육열’이었고, 부동산 다운계약서는 ‘절세’로 포장됐다. 같은 논문을 여기저기 발표하는 일은 ‘효율’적인 행동이고, 병역 기피는 ‘자식 사랑’, 부동산 투기는 ‘재테크’였다. 게릿 콜의 대답은, 청문회에 선 ‘후보자’들처럼 장황했다.

야당의 새 대표 선출 이후 ‘능력주의’가 주목받는다. 능력의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라도 끈적하게 달라붙은 ‘끈끈이’들이 먼저 제거돼야 한다. 규칙을 잘 지키는 이들이 손해보는 일은 능력주의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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