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전면 폐지 없이 민주주의 없다

한겨레 2021. 6. 1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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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이도흠 ㅣ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 발만 한반도를 벗어나도 우물 안 개구리를 절감한다. 토인비, 라이샤워와 페어뱅크 등 석학의 저술에서 백과사전, 교과서, 교양서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유럽만큼 진보한 문명으로 상당한 지면에 서술한 반면에 한국에 대해선 거의 언급조차 없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일본에 고대문화를 전수한 문명국”과 이 괴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일본풍(Japonism)의 대유행 등 다른 요인도 작용하지만, 이들이 현재를 통해 과거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크로체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현재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은 민주화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이후 “식민지와 내전을 겪은 가난한 독재국가”의 이미지가 시나브로 불식되기 시작하였고, 정보기술(IT) 산업의 발전, 한류, 특히 촛불항쟁으로 한국을 보는 눈이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우리도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라는 말을 곧잘 발설한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국가보안법 제정의 이유처럼, 유럽의 중세시대에 국가의 안보와 왕과 신의 권위를 위하여 허가받은 소수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나머지는 검열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권위주의 이론이 지배했다. 이에 맞서서 존 밀턴은 이미 1644년에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에서 “사상의 공개시장” 개념을 펼쳤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한 의견을 침묵시키는 것은 진리를 침묵시키는 것이다”를 비롯한 자유의 4대 기본명제를 담은 <자유론>(On Liberty)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계몽사상과 시민들의 투쟁이 더해지면서 자유주의 이론이 권위주의 이론을 밀어냈으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명시될 정도로 인류사회의 보편원칙이 되었다. 벤저민 카도조의 말처럼,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모체이자 절대 필요조건이다”.

그럼에도 21세기에 국가보안법의 유령이 이 나라를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은 1960~70년대에 남한 주민 대다수가 북한에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가 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강력했고, 지금도 국정원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을 무력화하며 출판사 대표와 시민활동가를 압수수색하고 검찰이 기소할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국정원이나 보수층은 북한의 호전성이나 적화통일 야욕을 존속 근거로 주장한다. 하지만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은 남한의 1.8%에 지나지 않으며 경제 격차는 50배에 이른다. 남한의 한해 국방비는 북한의 30배가 넘는다. 무엇보다 5만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이들은 ‘작전계획 5029’에 따라 본토의 미군과 결합하여 언제든 북한을 초토화할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은 남한을 ‘혁명 대상’으로 명시한 조선노동당 규약 중 ‘북 주도 혁명 통일론’ 관련 문구를 지난 1월 당 대회에서 삭제하였다.

그래도 안보를 위해선 진리를 희생해야 한다고? 1차 세계대전 때 <데일리 메일>지만이 영국군이 연전연패하는 사실과 문제점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정부와 시민들로부터 매국 신문과 간첩의 누명을 쓰고 갖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이 신문은 꿋꿋하게 진실 보도를 견지하였고, 이로 여론이 바뀌면서 정부가 문제점을 개선하여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전환하였다. 반면에, 그동안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하여 독재를 비판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정경유착과 부패를 비판하는 이들도 “빨갱이”로 몰아 처단하거나 배제하고 독재를 유지한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 헌법을 부정하는 반민주적, 반헌법적 악법이다. 이는 인권을 유린하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기제이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다. 180석의 민주당 의석과 절호의 기회라는 맥락에서 보면, 부분 개정의 꼼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마땅히 전면 폐지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위상을 굳건히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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