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플러스] 역사를 바꾼 한 컷의 힘..보도사진의 미래는?

이현준 2021. 6. 1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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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장면을 상징하는 사진들이죠. 왜곡 없이 현장 그대로를 보여주는 한 장의 보도 사진이 역사를 바꾸기도 합니다. 34년 전 민주화를 앞당긴 6월 항쟁도 이 한 장의 사진이 기폭제가 됐습니다. 보도 지침으로 언론이 통제받던 시절 이 사진은 어떻게 보도될 수 있었을까요? 이현준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녹취]전두환 당시 대통령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전두환 정권 막바지였던 1987년 초여름,

전두환 씨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무시한 채 간선제를 밀어붙였습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습니다.

[녹취]"살인고문 자행하는 폭력경찰 물러가라"

하지만 시위 대부분이 학생들 위주였다는 게 한계였습니다.

당시 정권이 직선제 요구를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인터뷰]이경란/당시 시위 참가자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은 일단 불편하잖아요. 교통이 막히고 최루탄이 맵고 하니까 시민들이 그때는 학생들을 야단을 많이 치셨어요,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대학 보내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나 한다고…"

민주화 세력은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면서 6월 10일 대국민 저항시위를 계획했습니다.

후에 6.10 항쟁으로 기억되는 그 날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이 시위를 막기 위해 더 폭력적으로 대응했고 결국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인터뷰]이경란/당시 시위 참가자
"연세대학교에서는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 대회가 있었어요. (평소에는) 최루탄을 허공에 쏘고 학생들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은 백골단이 와서 잡아가고 이렇게 한다고 했잖아요? 근데 그날은 좀 달랐어요. 그날 처음부터 전투 경찰들이 최루탄을 허공을 향해서 쏘는 게 아니라 똑바로 사람을 향해서 쏘기 시작했어요."

6.10 항쟁 전날 열린 이 출정식에서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을 맞고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이한열이 쓰러졌습니다.

10일부터 대학생이 최루탄에 맞았다는 뉴스가 보도됐고 11일자 중앙일보엔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 처음 실렸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많은 걸 바꿨습니다.

[인터뷰]이경란/당시 시위 참가자
"전에는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에요. 시민들이 박수를 쳐줘요. 시민들이 끝도 없이 들어오면서 시민들이 같이 시위를 해요. 그리고 높은 건물에서 학생들이 최루탄 맞고 그럼 매울까 봐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주세요."

시위 열기는 전국적으로 번졌습니다.

[녹취]"한열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결국 직선제가 받아들여졌습니다.

[녹취]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실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보도지침이 삼엄하던 시절,

이 장면은 그 날 현장에 있던 한 외신 사진기자 덕에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인터뷰]정태원/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최루탄을 발사하니까 학생들이 몰려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손이 올라가더니 학생이 쓰러졌어요. 그래서 따라가면서 계속 촬영을 한 거예요."

이한열을 부축했던 이종창 씨도 아직 그 날이 생생합니다.

[인터뷰]이종창/당시 연세대 시위 참가자
"교문 앞에서 한열이가 쓰러진 걸 발견하고 전경들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 안쪽으로 계속 안고 올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자들도 위험한 현장이었습니다.

[인터뷰]정태원/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경찰들은 저 철길 밑으로 해가지고 저쪽 도로 앞으로 해가지고 쭉 섰었어요. 최루탄 쏘고 학생들이 도망가잖아? 그럼 막 따라 들어와 뒤에서 막 방망이로 때리는 거야."

많은 기자들이 경찰 뒤편에 머물렀고, 교문 안까지 들어왔던 기자는 정태원 씨를 비롯해 2명뿐이었습니다.

[인터뷰]정태원/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전부 다 저 위에 있었어. 그때 한 그 날 한 20명 정도? AP랑 전부 다 있었어. 근데 그날 나는 여기서 근접하게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가까이 있었기에 결정적 순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정태원/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남산(안기부)에 있던 친구들인데 한 번은 사무실에 찾아와가지고 정태원이 오늘 너 취재 나가면 대갈통 바람구멍 난다. 야 기자가 인마 현장에 나가서 총 맞아 죽는 것 같이 영광된 게 어디 있느냐. 근데 나 죽는 건 괜찮은데 너는 아마 세계가 시끄러울걸? 나는 외국 통신사, 미국 통신사에 있어. 국내 통신사 아니야. 잘 생각하고 까불라고."

[인터뷰]이종창/당시 연세대 시위 참가자
"본질에 대한 메시지의 전달이 얼마나 잘 되는가가 중요한데 그 사진이 폭력 정권의 본질을 정확하게 시민들한테 전달한 그런 사진으로서의 의미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이 사진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입니다.

30여 년 간의 사진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지내고 있는 이창성 씨.

[인터뷰]이창성/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
"정 선배, 우리가 이 사진을 써야 되겠는데 좀 줄 수 없어? 그랬더니 자기가 아직 집에 있으니까 자기 서랍에 사진이 몇 장 있으니까 애들 시켜서 한번 가보라고. 사진을 딱 보니까 와 이거 대단한 사진이 있어요."

하지만 보도를 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이창성/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
"국장님, 이거 정말 대단한 사진입니다. 이거 써야 됩니다. 그러니까 국장이 갸우뚱하면서 아니 다른 신문도, 조간도 다 못 썼는데 어떻게 이 사진을 쓸 수 있겠느냐, 그 당시에는 정말 사진 한 장 잘못 쓰면 편집국장부터 정말 치욕을 맞을 때였거든요. 마감 시간대까지 결론이 안 났어요. 그때까지 저는 막 국장한테 계속 대드는 거죠."

종일 씨름한 끝에 이한열 사진은 11일 자 신문에 인쇄될 수 있었습니다.

국내 보도사진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인터뷰]이창성/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
"정말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는 사진이구나. 전 자신했어요, 정말. 겁은 좀 나지. 좀 캥기긴 한데 뭐 어떡합니까, 이미 신문에 보도는 했고 나는 할 일 다 했는데…"

한때 보도사진은 이렇게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지만 이젠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종이신문 구독자 수가 줄면서 보도사진의 영향력도 축소됐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하상윤/세계일보 사진기자
"포토라인에 유튜버들이 오기 시작했거든요. 근데 여기는 포토 라인이니까 포토만 서세요라고 말을 할 수 없잖아요."

특히 미디어 시장은 사진보다 동영상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진기자에게도 영상 촬영을 요구합니다.

한국사진기자협회에 등록된 사진기자 수는 약 5백 명.

10년째 거의 그대롭니다.

인터넷 사진기자들은 늘었지만 10대 일간지 사진기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인터뷰]하상윤/세계일보 사진기자
"신입을 뽑은 지 10년 가까이 된 회사들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차장급인데 아직도 부서 안에서 막내인 선배들도 있거든요."

2019년에 한국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탄 김경훈 사진기자도 달라진 현실을 인정합니다.

다만 사진기자들이 찍는 보도사진의 의미와 가치는 일반적인 사진들과 여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인터뷰]김경훈/로이터통신 도쿄지국 수석 사진기자
"사진 기자들만이 할 수 있는 건 바로 진실을 공정하게, 빠르게 보도한다는 것입니다. 사진기자들은 촬영하러 갑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취재를 하러 갑니다란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 사건이나 혹은 그 뉴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가서 여러 가지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 중에서 가장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그 장면을 포착을 하는 거고요."

특히 단 한 장의 사진이 가진 힘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김 기자의 생각입니다.

퓰리처 상을 받은 사진도 중남미 난민들이 '갱단의 일원'이 아니라 그들도 같은 사람이고, 가족임을 일깨워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인터뷰]김경훈/로이터통신 도쿄지국 수석 사진기자
"우리 현대사회에 있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을 생각을 해보면 대부분의 사진의 이미지로 그게 떠오를 거예요. 그게 어떤 동영상에 대해서 떠오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되는 것은 사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검찰 조사실에서 팔짱끼고 웃고 있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 사진 한 장이 국민적인 분노를 촉발하고 검찰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이한열 열사 34주기인 올해,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30년이 넘게 흘렀어도 정태원 사진기자가 고맙습니다.

[인터뷰]배은심/이한열 어머니
"그 선생님한테는 항상 고마워요. 사진을, 그 선생님이 사진을 찍어서 그게 안 나왔으면 우리 한열이의 죽음이 어떻게 변했을지 저는 알거든요."

세상을 바꾼 보도사진은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그 역사의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단 한 장의 사진이 가진 힘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하는 기자들 Q 이현준입니다.

이현준 기자 (hjni14@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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