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전략 '조선 분단' 여전한데 어찌 편히 잠드실까"

한겨레 2021. 6. 1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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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재일동포 원로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 영전에
2020년 공저한 <여운형평전>(4권)으로 ‘독립기념관 학술상’ 수상한 고 강덕상 교수. 독립기념관 제공

2살 때 일본 건너가 정체성 혼란 겪어
와세다대학 시절 ‘조선사 연구’ 결심
‘관동대지진 조선인 제노사이드’ 규명
1989년 ‘재일동포 첫 국립대 교수’로
말년 투병중 ‘여운형평전’ 필생의 역작

“0.5끼리 싸우면 0.25 된다” 통일 역설

재일동포 원로사학자 강덕상 선생이 지난 12일 오전 9시30분 도쿄에서 별세했다. 향년 90. 선생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문제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다.

내가 선생의 이름에 유념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서울 종로1가 일대의 일본책 서점에서 우연히 선생이 번역한 박은식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일어판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상하이임시정부의 정신적 영도자라 할 수 있는 박은식의 대표적 저술조차 한글판이 온전한 형태로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훌쩍 지난 2009년의 늦가을 ‘경술국치 백년’을 앞두고 일본과 한국의 원로 학자들을 심층 인터뷰하는 기획의 하나로 선생을 처음 만났다. 장소는 도쿄 아자부에 있는 ‘재일한인역사자료관’이었다. 선생은 재일동포의 역사와 삶을 보여주기 위해 2005년 개설된 이 자료관의 초대 관장을 맡아 이끌었다. 이후 도쿄에 갈 일이 있으면 신주쿠역에서 멀지 않은 선생의 자택을 찾아가거나 선술집에서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듣는 행운을 누렸다. 소탈하고 겸손한 인품에 무게중심이 확실한 분이었다.

2012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한 고 강덕상(오른쪽) 교수가 김효순 전 대기자와 본사 입구 주주 명단 동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필자 제공

193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두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에서 쭉 자랐다. 조선인 멸시풍조가 만연돼 있던 세상이라 어렸을 때부터 자기부정과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이름이 3개 있었다고 말할 때는 표정이 어두웠다. 본명 말고 일본식 이름이 있었다. 소학교 3학년 때 담임이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며 억지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또 하나는 와세다대학 사학과 재학 시절 저명한 노동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야마베 겐타로의 영향을 받아 조선사 연구에 투신하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학우들에게 털어놓으며 ‘본명 선언’을 했다. 하지만 그때도 일본식 한자음으로 이름을 밝힐 정도로 압제적인 사회 분위기였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간 1950년은 냉전 격화와 한국전쟁 발발의 여파로 일본 사회에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선생은 집회에서 ‘거물들’ 옆에 서 있다가 체포돼 퇴학처분을 당했다가 1년 뒤 겨우 복학됐다. 이후 운동에서 발을 빼고 공부에 전념한 것이 학문적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1964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때 일본 국가권력이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관여했다고 규명한 것은 대표적 업적의 하나이다. 미국이 점령 초기 압수했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문서를 1960년대 초반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 다시 일본에 보낸 ‘반환문서’를 면밀히 검토해 밝힌 것이다. 그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관심은 한말의 의병전쟁, 1920년의 ‘경신대학살’(간도참변)에 대한 연구로 확대됐다. 관동대지진의 학살이 우연이 아니라 ‘제노사이드’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장기간 시간강사로만 전전하던 선생이 히토쓰바시대학 교수로 임용된 것은 1989년이다. 일본인이었다면 진작에 대학에 자리 잡아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늦깎이 교수가 된 것이다. 재일동포로는 첫 국립대 교수였다.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17년 3월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다. 1년 전에는 사경을 헤맬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고 원고를 마무리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우울증까지 걸렸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광복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더라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여운형의 평전을 생전에 4권까지 냈으니 필생의 작업을 완료한 셈이다.

선생의 말년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더욱 거세진 시기와 일치한다. 일본 공영 <엔에이치케이>(NHK)방송은 우리의 ‘국치 백년’에 해당하는 2010년에 다양한 역사다큐를 제작했다. 제작진은 사전에 선생을 비롯해 오랜 학문적 ‘동지’인 미야타 세쓰코와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실제 방영된 다큐에 두 사람은 단 1초도 등장하지 않았다. 선생은 이 얘기를 하며 담당 피디에게 빌려간 자료를 당장 반환하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언제나 진중하던 선생이 그렇게 노기를 띠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제작진이 우익들의 시비를 고려해 ‘자기검열’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선생이 오랜만에 ‘그리운’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허탈하게 웃던 기억도 있다. 자택 앞에 자전거를 이상하게 놓고 가는 사람이 있어 따졌더니 “조센징이..”이라는 말이 돌아왔다고 한다.

선생은 “조선의 분단이 전후 일본의 국책이었다”는 말도 자주 했다. 남북이 갈라져 있어야 일본의 약점이나 가장 아픈 곳에 들이대지 못하니까 화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0.5와 0.5가 싸우면 1이 아니라 0.25가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보면 선생은 저세상에서도 평안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두렵다.

김효순/전 <한겨레> 편집인 겸 대기자

2000년 4월 출간된 평전 ‘시무의 연구자 강덕상’의 표지. 강덕상구술간행위원회 제공.

*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문양자씨와 딸 수령·미령, 아들 우성씨가 있다. 빈소는 일본 도쿄 요요기병원, 20일 발인해 고쿠헤이지에 봉안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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