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약 챙겨주고 말벗돼주고..열 자식 안부럽다 [스페셜 리포트]

정혁훈 2021. 6. 1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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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 REPORT : '에이징테크' 산업이뜬다 ◆

지난겨울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박상훈 씨(가명·76). 살짝 넘어졌는데도 허리 근육이 손상되고 왼쪽 무릎뼈가 부러졌다. 허리는 물리치료로 회복이 가능했으나 골절된 슬개골은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은 잘됐지만 두 달간 왼쪽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해야 했다.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곤혹스러운 건 화장실을 이용할 때였다. 혼자 변기에 앉기가 어려워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상대가 여성이라 영 불편한 게 아니었다. 간병인은 애써 무심한 듯 도와줬지만 수치심을 참는 게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노인이나 환자들이 화장실 이용 걱정을 상당 부분 덜 수 있을 전망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전자동 변기가 상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멜빈사가 개발한 자동 변기는 사람이 팔을 걸치고 몸을 뒤로 기대기만 하면 바지를 자동으로 내려준 뒤 변기가 위에서 아래로 자동으로 내려가면서 사람을 편하게 앉히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 관심권으로 부상한 에이징 테크 산업
고령자들이 일상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인 이른바 '에이징 테크(Aging Tech)'가 새로운 성장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에이징 테크는 말 그대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위한 기술을 통칭하는 말이다.

전자동 변기처럼 몸이 불편한 노인이나 환자를 돕는 장치가 에이징 테크의 대표적 사례다. 일본 파나소닉이 개발해 화제를 모은 '휠체어로 변신 가능한 침대'도 그런 사례다.

에이징 테크의 대표적인 분야로 로봇의 진화도 눈부시다. 사람과 어느 정도 소통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감정과 정서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이른바 '소셜 로봇(Social Robot)'이 고령자의 일상생활을 돕는 에이징 테크 로봇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미 초고령사회에 도달한 일본에서는 노인 돌봄 로봇 개발업체가 10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와가 아기 바다표범 모양으로 내놓은 동물형 치유로봇 '파로(PARO)' 역시 그중 하나다. 각종 센서와 인공지능(AI)으로 무장한 파로는 어루만지거나 말을 걸면 소리를 내거나 눈꺼풀, 다리 등을 움직이며 반응한다. 고령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감정 표현이 가능해 실제 동물을 활용한 치료 요법과 동일한 효과를 낸다고 한다.

일본 PIP가 개발한 인형 모양 로봇 '카보짱(Kabochan)'은 노인들의 인지기능이나 기분 저하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 소프트뱅크는 프랑스 알데바란로보틱스와 공동으로 '페퍼(Pepper)'를 내놨다. 사람 모양을 한 페퍼는 바퀴로 움직이고, 인간의 감정까지도 인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 국내에서도 보급되기 시작한 반려로봇

국내에서도 많은 기업이 에이징 테크 로봇 개발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지방자치단체들이 나서서 '반려로봇'을 고령자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보급 규모가 작아 검증 단계이긴 하지만 확산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서울 구로구는 지역 내 치매 환자와 독거노인 등에게 대화가 가능한 스마트 토이 로봇을 얼마 전 제공했다. 이 로봇 인형에는 반응형 센서가 내장돼 있어 머리 쓰다듬기 등 사용자와 교감이 가능하다. 치매 예방을 위한 퀴즈와 체조 등을 인형과 함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약 복용시간 등을 알려주는 알람 기능도 탑재돼 있어 노인에게 유용하다. 일정 시간 노인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으면 보호자에게 알려주는 기능도 있다. 구로구 관계자는 "노인의 정서 교감과 생활·건강관리, 안전 등을 지원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포구는 우울증과 만성질환, 인지장애 등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지역 내 노인에게 최근 반려로봇을 제공했다. 구는 이번에 보급된 반려로봇이 노인 정신건강과 돌봄수행 인력 등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대학병원과 공동으로 실증연구에도 착수했다.

용인시 처인구보건소는 토닥거리기 등 교감 활동이 가능한 돌봄로봇을 지역 내 치매 노인에게 선별 제공했다. 시 관계자는 "체조와 음악, 퀴즈 등 인지 자극 프로그램이 탑재돼 있어 치매환자들이 다양한 신체활동을 하도록 돕는 기능이 있다"고 소개했다.

에이징 테크 스타트업 로보케어는 자체 개발한 로봇으로 지자체 등과 협력에 나서고 있다. 치매안심센터 등에서 사용 가능한 그룹형 인지훈련로봇 '실벗'을 비롯해 일대일 두뇌기능 향상 콘텐츠를 탑재한 데일리 케어 로봇 '보미', 사람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휴머노이드형 소셜로봇 '아로' 등이 대상이다.

◆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보내고 싶은 노후

우리가 에이징 테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우선 인구학적으로 우리나라는 고령인구가 유독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2011~2020년 고령인구 증가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1위다. 65세 이상 인구의 연평균 증가율이 OECD는 평균 2.6%인 반면 한국은 4.4%로 2배 가까이 높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중이 2017년 14%를 넘어서 고령사회에 진입한 데 이어 2026년엔 20%를 넘어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특히 출산율 저하가 심각하다. 합계출산율이 1.0명 이하로 줄어들면서 한 해 태어나는 신생아 수가 30만명 미만으로 줄었다. 오종남 SC제일은행 이사회 의장(전 통계청장)은 "과거엔 젊은 층이 노인을 부양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인구구조 자체가 젊은 층이 노인을 부양하기 어렵다"며 "과거에 통하던 이른바 '자식보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에이징 테크를 활용한 노인 부양이 갈수록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또 에이징 테크는 노후생활을 병원이나 요양원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임태희 한경대 총장은 "우리가 에이징 테크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대신에 집에서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편안하게 노후생활을 보내고 싶어 하는 노인들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 총장은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에이징 테크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그런 시장성을 읽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선진국 따라가려면 국가적 관심 가져야

우리나라의 에이징 테크 수준은 현재 걸음마 단계로 평가된다. 이형민 한경대 교수는 "작년 정부 예산 512조3000억원 중 에이징 테크에 관련돼 있다고 볼 수 있는 고령친화 산업 육성 예산은 고작 32억4000만원에 불과했다"며 "전체 예산 중 0.00063%로는 에이징 테크를 산업으로 키우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에이징 테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학과 기업, 지자체, 수요자가 공동으로 에이징 테크 개발에 협력하는 모델을 가동하고 있다. 특히 도쿄대는 가마쿠라 리빙랩이라는 연구소를 운영해 '상생(相生)'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에이징 테크를 상용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국은 에이징 테크 관련 스타트업 설립 지원을 위해 정책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에서는 정부 지원이 부족한 데다 학계에서도 전공별 칸막이가 새로운 에이징 테크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교수는 "정부나 대학에서 새로운 에이징 테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부처 간, 학과 간 융·복합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며 "분야별 칸막이를 없애고 융·복합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에이징 테크가 꼭 필요한 4대 분야로 △부족해지는 인적 교류를 보완하고 인지적 불편을 해소하는 소셜 로봇 △내 집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전문 주거시설 △노화로 인한 주거생활 불편을 최소화하는 가전과 로봇 △의료계와 협력해 건강한 노후를 보장하는 비즈니스를 꼽았다.

"에이징 테크 수요 폭발할것…정부 지원 서둘러야"

이철배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

"매우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에이징 테크 산업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산업의 핵심은 '기술'보다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에이징 테크 산업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철배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전무·전 뉴비즈니스센터장)은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롭게 부상하는 에이징 테크 산업에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게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센터장은 "에이징 테크에서 사용하는 기술은 사실 다른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먼저 상용화된 기술이 대부분"이라며 "에이징 테크 산업이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난도의 극복보다 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려하는 정책 당국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당국의 의지는 에이징 테크 산업으로 자금이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이 센터장은 "에이징 테크 기술을 활용해 노인들이 일상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그런 기술이 상품화되려면 충분히 매력적인 시장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노인들에게는 자신의 돈을 주고 에이징 테크 기기를 구매할 만한 경제 여력과 인식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낙상을 방지하거나 치매 발생 시기를 늦출 수 있다면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데, 이런 분야에 대해 개인에게 선제적인 지출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정부와 공공의료보험기관에서 의지를 갖고 에이징 테크 산업으로 자금이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에이징 테크 산업을 키우는 것이 정부 입장에서도 절대 손해가 아니라고 이 센터장은 강조했다. 그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젊은 세대의 노인 부양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에이징 테크를 통해 노인의 건강 나이와 활동 시간이 연장되고, 장기 치료나 요양에 들어가는 재정 부담을 줄인다면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이징 테크 산업을 키우려는 충분한 의지와 사회적 여건이 형성된다면 기술적 문제는 이미 많은 부분이 해소됐다는 게 이 센터장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노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전동 휠체어는 100㎏이 넘는 무게 때문에 일반 승용차에 싣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최신 배터리와 모터 기술을 활용하면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무게를 40㎏까지 낮추고, 조립식으로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더 가볍고 안전하고 사용성이 높은 전동 휠체어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노인들의 구매력을 대신할 정책적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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