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는 유대인

한겨레 2021. 6. 1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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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ㅣ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지난달 나는 내가 슬로베니아 시민이라는 사실이 무척 수치스러웠다. 슬로베니아 정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며 슬로베니아 정부청사에 이스라엘 국기를 함께 게양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 정부는 하마스가 먼저 로켓포 공격을 시도함으로써 분쟁을 시작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사태는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을 강제로 추방하려 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였다. 정치적 위기에 있던 네타냐후 총리는 (비난받아야 할)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을 빌미로 삼아, 인종청소에 절망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또 다른 분쟁으로 바꾸었다.

여러 도시에서 양측 간 무력을 사용한 교전이 일어났다. 극우 유대계 주민들이 권총으로 무장하고 폭력을 휘둘렀지만, 이스라엘 공공안전부 장관은 이들을 국가를 돕는 이들이라며 추켜세웠다. 이스라엘 경찰은 자신들이 법과 공공안전을 지키는 이들이라는 시늉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폭력을 방관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법치가 사라진 것이다. 고립되어 홀로 남겨진 그들은 이제 공격을 당해도 어디에도 중재를 호소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최근 수년간 이스라엘의 공적 정치 담론이 극우파의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받아들인 결과다. 과거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인종주의적 입장을 견지할지언정 최소한 겉으로는 국제법을 존중하고 양국 방안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제 그들은 법을 존중하는 척조차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법이 지배하는 근대 국가로, 아랍 국가들을 종교적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국가들로 대비시켜왔다. 하지만 지금 세속적 중립성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는 쪽은 팔레스타인이고, 종교적 근본주의 국가로 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더 큰 맥락을 보면 전체 그림은 더 어두워진다. 지난 4월과 5월, 프랑스와 미국에서 각각 퇴역 군인들이 자국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프랑스 장성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을, 미국 장성들은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다. 국가주의적 의제에 대한 지지다. 이스라엘 사태는 이런 세계적 추세의 일부분이다.

이것이 유대인 정체성에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이 지적하듯 “과거 반유대주의자가 유대인을 싫어하는 이들이었다면, 지금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이들이다.” 최근 <슈피겔>에 실린, 반유대주의 및 이스라엘 보이콧을 주제로 한 대담에서 “누가 반유대주의자인지는 반유대주의자들이 결정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라는 주장이 실렸다. 지극히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 누가 피해자인지를 피해 당사자가 결정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인들 역시 자신들의 땅을 누가 약탈했고 자신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가 박탈했는지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반유대주의자를 구분하고 결정하는 그 ‘유대인’은 누구인가의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유대인들이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회의적인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란 말인가? 위의 주장은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유대인들은 겉으로만 유대인일 뿐, 저 깊은 속은 유대인이 아닌 이들, 유대인 정체성을 배반한 이들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카를로 긴츠부르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조국에 깊은 소속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진정한 표시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수치심이라고 말했다. 2014년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들 수백명은 <뉴욕 타임스>에 광고를 게재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자행하는 학살과 식민화가 수치스럽게 느껴진다며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용기를 모아, 이스라엘이 벌이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는 이스라엘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유대주의의 소중한 유산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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