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메모]재난 현장 '요란한 의전' 이제 그만하시죠
[경향신문]
지난 11일 오후 5시30분쯤 광주 동구청 광장에 이용섭 광주시장과 임택 동구청장이 나란히 섰다. 재개발 붕괴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곳이었다. 이들과 함께 공무원 여럿이 광장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기 오십니다.” 20분 뒤 한 공무원이 손가락으로 동구청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난 직후, 현장은 숨 돌릴 틈이 없다. 사고 원인 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관계 기관들은 전심전력을 다한다. 희생자 수습과 유가족 지원도 중요한 업무이다. 엉뚱한 곳에 힘을 쏟다간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난 현장은 늘 ‘가욋일’로 바쁘다. ‘높으신 분’이 올 때마다 생기는 의전 때문이다. 정·관계 인사들의 방문은 부지기수고, 이들을 현장에서 수행하기 위해 십수명이 쓸데없이 힘을 뺀다.
철거 건물 붕괴로 9명이 사망한 당일(9일)에도 밤늦게 광주를 찾은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 앞에서 소방안전본부장이 브리핑을 했다. 2019년 서울 제일평화시장 화재 현장에서는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앞에서 소방대원들이 도열해 논란이 됐다.
과도한 의전은 유가족이나 현장을 찾은 시민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지난달 8일 고용노동부 관계자들은 평택항에서 일하다 숨진 이선호씨 빈소에서 노동·시민단체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말을 끊고 우르르 1층으로 내려갔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지난 11일 광주 분향소에서는 한 지역 정치인이 분향소 담당 공무원을 야단치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대선 주자 이력을 가진 야당 대표 화환을 다른 화환보다 뒤에 세워놨다는 이유였다.
정·관계 인사들의 현장 방문을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겠다’ 등 그들이 내놓는 메시지는 정책 변화를 이끌어낸다. 문제는 주객전도식 의전이다. 임택 동구청장은 “유영민실장이 의전을 원치 않는다며 택시를 이용했다. 도착 예정시간보다 늦어져 기다리게 됐다”고 했지만 윗사람이 손사래 쳐도 아랫사람은 안절부절못하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수해 복구 현장을 찾은 국회의원들이 인증샷을 찍어 논란이 됐다. 당시 일부 정당은 ‘의전 및 언론 대동 금지’가 포함된 ‘호우 피해기간 의원단 행동 지침’을 마련했다. 이 지침을 모든 재난 현장에 적용할 수 없을까. 1초라도 아껴 대책을 마련하는 게 상처받은 시민을 진정 위로하는 길이다.
사회부 |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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