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 정치철학의 결정체

2021. 6. 1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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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

[신빛나리 예술가]
진리 정치와 권력 정치가 공유하는 문제는 둘 다 정치가 불확실성과 무지의 고유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내버려 두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물음에 대하여 너무 이른 답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진리 정치인들은 틀린 사람들의 주장을 너무 빨리 일축하고, 권력 정치인들은 약한 사람들의 요구를 너무 빨리 경시한다.(250)

2021년 5월 현재, 한국에 번역된 브뤼노 라투르의 저서는 총 네권(<젊은 과학의 전선(1987 : 2016)>,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3 : 2009)>, <판도라의 희망(1999 : 2018)>,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2018 : 2021)>)이다.

이 일련의 책들은 인류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과학 및 현대의 기술사회를 분석해온 라투르의 과학기술사회 학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한국 독자들에게 그레이엄 하먼의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2014 : 2021)>(이하 브뤼노 라투르)가 다루는 주제 — 라투르의 정치철학 — 는 일견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인류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닌 형이상학자로서의 라투르를 조명하는 최초의 저서인 <네트워크의 군주: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2009 : 2019)>을 저술한 바 있는 객체지향 철학자 하먼은 <브뤼노 라투르>의 서문에서 인문 및 과학 분야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라투르의 독창적인 형이상학이 철학이라는 분과 학문 내에서 만큼은 여전히 잘 알려져있지 않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표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투르가 철학자라는 점이 당연시 된다면, 그의 저작에서 어떤 정치철학을 찾아낼 수 있는가?"(41)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먼이 이 책을 저술할 당시인 2014년으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객체지향 철학이 서양현대철학의 가장 영향력있는 조류 중 하나로 여겨진다는 점 또한 객체지향 철학이 기후위기라는 전지구적 문제 상황의 해결에 새로운 인식론적 실마리를 제안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객체지향 철학의 주요한 개념적 영감인 ANT(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고안자이자 신기후체제 내에서 생태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라투르의 정치철학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독창적인 지적 행보를 걸어온 브뤼노 라투르는 전통적인 분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국한되는 책을 저술한바 없으며 본인의 정치철학에 대해 특별히 개괄한 적이 없다. 따라서 <브뤼노 라투르>는 하먼이 상술하였듯이 라투르가 철학자라는 점을 '가정'한 후, 그의 주요 저작들 도처에 등장하는 힘과 동맹, 위임과 같은 정치적 용어들을 '추적'하여, 일관된 정치철학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먼은 라투르 정치이론이 총 세단계에 걸쳐 변화해왔다고 보고 각 시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세 저작(<프랑스의 파스퇴르화(1984)>, <자연의 정치(1999)>, <존재 양식들에 관한 탐구(2012)>)을 중심으로 홉스주의적 권력정치에 기울어져있던 라투르의 초기 구상이 중기의 사물정치를 지나 존재의 한 양식으로 정치를 제한하는 후기의 사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분석한다.

하먼의 접근에서 흥미로운 점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다양한 연합에 의해 구성되는 네트워크의 존재론을 주장하는 라투르의 정치적 입장을 이미 존재해온 정치적 지형 내의 특정 위치로 단순하게 환원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네트워크가 내포하는 관계 지향성, 미리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권리들의 확장을 지지하는 개방성을 이유로 라투르를 좌익 정치 이론가로 규정하지 않으며, 오직 행위자들의 동맹만이 존재하는 세계 안에 패자를 위로할 만한 초월적 정의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자유주의적 권력투쟁을 옹호하는 우익 성향의 정치 이론가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하먼은 오히려 좌익 혹은 우익 사이의 "이러한 구분이 개인과 집단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 식별을 계속해서 지배하는 한"(252) 라투르를 정치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먼에 의하면 정치적 좌익과 우익의 구분은 사회 이전의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서로 상반된 가정 — 홉스주의적인 야만 혹은 루소주의적 이상향 — 에 기반하는데 라투르의 존재론은 인간의 본성이라 불릴 수 있는 '자연 상태' 개념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좌익 혹은 우익 사이의 이분법에서 벗어난다. 대표작으로 알려진 저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주장한바대로 라투르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순수한 상태를 결코 상정하지 않으며 오직 매개들의 연합만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 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회복해야 할 선한 본성도 통제되어야 할 악한 본성도 라투르의 정치 개념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것은 허구적인 인간 본성에 기반한 정치적 목표들이 아니라 인간들과 연합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정치 상황을 촉발하는 사물들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좌익 정치와 우익 정치의 이분법에 더하여 하먼이 지적하는 또 다른 정치적 이분법은 진리 정치와 권력 정치이다. 이들은 좌익 및 우익 정치 양측에서 모두 등장하는데, 진리 정치가 문자 그대로 진리로 여겨질 수 있는 초월적 관념에 대한 인간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그러한 관념의 형상대로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권력 정치는 여타의 초월성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내재적 권력 추구만을 정치에 있어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먼은 초월적인 본성 개념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라투르의 정치적 태도가 권력 정치의 측면에서 시작하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지나며 권력 정치의 전제가 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정치화'라는 함정을 피한다고 주장한다. 하먼에 의하면 이러한 선회는 <존재양식들에 관한 탐구>에서 라투르가 정치를 다양한 존재 양상 중 하나로 명시하는 것에서 두드러진다.

<존재양식들에 관한 탐구>로 정치철학의 후기 단계에 이르른 라투르는 정치 역시 다른 객체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주기를 갖는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2007년의 저작 <정치를 전환하기>에서 아래의 다섯 단계로 설명된바 있다 ; 1) 새로운 쟁점을 발생시키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새로운 연합체들"(<정치를 전환하기>, 817)(187에서 재인용)의 형성, 2) 이러한 쟁점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공중의 구현, 3) 쟁점과 주권 문제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의 출현, 4) "발언하고, 계산하고, 타협하며,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완전히 의식적인 시민들"(같은 책)(188에서 재인용)에 의한 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의 조성, 5) 쟁점들의 "행정과 관리의 일상적 대상"(같은 책)(189에서 재인용)으로의 전환. 각각의 단계에서의 정치적인 것은 서로 다른 단계에서의 정치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정치적인 것이 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이와 관련하여 라투르는 "정치는 어떤 본질이 아니고, 정치는 움직이는 것이며, 정치는 궤적을 갖는 것이다"( 같은 책, 814)(369에서 재인용)라고 덧붙인다.

다양한 쟁점들과 사물들의 기묘하고 생소하며 복잡한 얽힘이 그와 관련된 다수의 공중을 교란할 때 정치적인 것이 시작된다는 라투르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것은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쟁점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온전히 알 수 없으므로 정치적인 것에 대해 항구적으로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먼은 불확실성과 무지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라투르 정치철학의 가장 큰 기여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하먼은 스스로가 제시한 전통적인 정치의 사분법 모델에서 라투르의 정치철학이 우익-권력 정치와 일견 가장 큰 유사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매도하는 관점에 대해 경계를 표한다. 하먼에 의하면 "라투르는 행위자들이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구상을 언제나 넘어선다는 관념을 깊이 신봉한다. 이런 신념은 울분의 격렬한 분출이 아니라 신중한 실험의 정치를 수반한다"(86) 그리고 이러한 신중함은 우리의 존재 조건인 불확실성과 무지에 대한 존중에서 기반하는 것이기에 철저히 겸손함과 동시에 철저히 현실적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전반에 걸쳐 분석의 초점이 되는 라투르의 세 저작(<프랑스의 파스퇴르화>, <자연의 정치>, <존재양식들에 관한 탐구>) 모두가 현재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라투르 사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하먼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읽어 나가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현재의 기후 위기 상황에서 가능한 생태정치에 대한 라투르의 좀 더 최근의 저작들을 읽기에 앞서 이 책이 라투르 정치철학 전반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Harman, Graham(2014).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 김효진 역(2021). 서울: 갈무리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신빛나리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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