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걸림돌이 되면..옛 동지도 반역자일 뿐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1. 6. 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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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 초기 중공중앙의 서열 1위부터 4위까지: (왼쪽부터)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1회>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눈물을 흘리며 아끼던 장수 마속(馬謖, 190-228)을 처형했다. 어리석게도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위(魏)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휘하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군사적 패착의 책임을 엄중히 물었던 것. 이후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한 법 집행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제갈량은 법과 원칙을 세우기 위해 마속을 처형했지만, 마오쩌둥은 혁명의 미명 아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동지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1969년 11월 독방에 감금된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가 의료 방치로 쓰러진 후, 채 한 해를 못 넘겨 마오쩌둥은 천보다(陳伯達, 1904-1989)에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이듬해엔 린뱌오(林彪, 1907-1971)를 대역 죄인으로 몰아 파멸시켰다.

읍참마속과는 정반대의 정치 행위였다. 그 행위를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모훼소기(謨毁少奇, 모략으로 류샤오치를 제거함)” “돌파백달(突罷伯達, 돌연히 천보다를 파면함)” “조폭임표(嘲爆林彪, 조소하며 린뱌오를 폭격함)”는 어떨까. 신조어들이지만, 음모를 짜서 아랫사람을 제거하는 비정한 보스를 질타할 때 유용할 듯하다. 마오는 아랫사람을 처단할 때 제갈량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스스로 배신자와 반역자를 단죄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31년간 마오쩌둥을 섬겼던 천보다의 비참한 몰락이 그의 비정(非情)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혁명 사상 집필자 천보다의 몰락

1930년대 말 연안 시절부터 천보다는 등 뒤에서 마오쩌둥의 연설문, 지시문, 논설 문장 등을 집필하는 유령작가로 암약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천보다는 스탈린 탄생 70주년을 경축하는 “스탈린과 중국혁명”(1949)을 발표했다. 마침 마오쩌둥이 스탈린의 고희 축하연에 초대되어 공산권 지도자의 한 명으로 난생 처음 모스크바을 방문할 즈음이었다. 대원수를 접견해야 하는 마오쩌둥을 위해 천보다는 미리 스탈린에 아첨하는 사전 포석을 깔아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2년 후, 천보다는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하는 두 권의 책 <<마오쩌둥사상을 논함>>(1951)과 <<마오쩌둥, 중국혁명을 논하다>>(1951)를 발표했다. 이로써 천보다는 자타공인 “마오쩌둥 사상”의 최고 전달자가 됐다.

1950년대 초부터 중공중앙의 굵직한 정책이 입안될 때마다 천보다는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정돈해서 문서화했다. 그는 중국공산당 “공동 강령”의 초안을 작성했고, 헌법 초안도 집필했다. 1950년대 마오쩌둥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농업 합작사” 관련 결의안들도 천보다의 작품이었다. 대약진운동(1958-1962) 당시 “농촌인민공사조례 9장 60조”의 모든 항목을 천보다가 직접 작성했다.

마오쩌둥이 “인민공사, 좋다!”고 하면, 천보다는 식당, 양식, 공급제 등등 모든 문제들을 꼼꼼히 점검해 인민공사의 구체적 청사진을 짰다. 마오쩌둥도 인민공사의 발명권은 천보다에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마오쩌둥 선집>>을 포함해 마오쩌둥 명의의 대다수 저서들은 천보다의 손길을 통해서 정리되었다. 1958년부터 격주로 발행된 중공중앙 최고의 기관지 <<홍기>>의 편집장이 바로 천보다였다. 문혁 직전 사청운동(四淸運動, 1963-1965)의 밑그림 “사회주의 교육운동 23조”도 천보다가 작성했다. 문혁 초기 중공중앙의 기본강령 “5.16 통지”도 천보다가 정리했다. 문혁 초기 <<홍기>>지의 모든 사론(社論)들 역시 천보다의 지시 하에서 작성되고 출판됐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장칭(江靑), 천보다(陳伯達), 캉성(康生), 장춘차오(張春橋). 마오쩌둥은 1966년 천보다를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으로 임명했다./ 공공부문>

31년 간 천보다는 마오쩌둥만을 위해, 마오쩌둥의 의도에 따라, 마오쩌둥의 명의를 빌어, “마오쩌둥 사상”을 짜고, 급기야 마오쩌둥을 인격숭배의 대상으로 만든 마오쩌둥의 브레인(brain)이었다. 천보다를 영혼 없는 꼭두각시라 볼 수만은 없다. 인간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마오쩌둥이 천보다를 이론가로 썼던 만큼, 천보다는 마오쩌둥에 영향을 끼치고, 또 그를 이용했다 볼 수 있다. 문혁 시절 마오는 천보다를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에 임명했다. 중공중앙에서 그의 서열은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다음으로 제4위까지 올랐다. 그의 지위는 마오의 부인 장칭과 마오의 정보통 캉성보다 높았다.

사마천(司馬遷, 대략 기원전 145- 미상)이 그린 이사는 진시황을 지배하는 법가혁명의 주동자다. 어쩌면 천보다 역시 마오쩌둥을 만든 중국 공산혁명의 주동자라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천보다의 역할은 이사에 못 미쳤다. 이사는 진시황의 최후까지 막후에서 최대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천보다는 문혁의 절정에서 마오쩌둥에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1970년 중공 9기 2차 전회에서 천보다는 권력을 잃고, 곧 인신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마오 “천보다, 요설과 궤변으로 동지들을 기만했다”

천보다의 정치적 파멸은 이른바 “천재 논쟁”과 “국가주석 논쟁” 등 두 가지 미묘하고도 부조리한 정치적 입장의 충돌에서 시작됐다. 이 두 논쟁은 1970년 8월 23일 중공 9기 2차 전체회의에서 헌법 수정안을 둘러싸고 전개됐다. 린뱌오와 천보다는 류샤오치가 파면된 후에도 국가주석의 직위를 견지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야심을 의심하는 반대세력에 맞서기 위해 그는 마오쩌둥에 직접 국가주석에 취임해 달라 요청했다. 아울러 린뱌오와 천보다와 수정 헌법의 전문에 다음 구절을 삽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당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다. 마오쩌둥 동지는 천재적으로, 창조적으로, 전면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 호위, 발전시켰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참신한 단계로 제고했다.”

이 구절에서 “천재적으로, 창의적으로, 전면적으로”라는 세 구절은 린뱌오가 편집한 “마오쩌둥 어록집” 소홍서(小紅書) 재판의 서문에서 적힌 글귀였다. 그 세 구절의 저작권은 물론 린뱌오에 있었다. 린뱌오는 그 세 마디를 수정 헌법의 전문에 삽입함으로써 마오쩌둥의 절대 권위에 올라타려 했다. 천보다는 이론적으로 린뱌오를 뒷받침했다. 린뱌오의 야심을 경계했던 마오쩌둥과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했지만, 바로 다음 날 (8월 24일) 천보다는 “마오주석의 겸양(謙讓)을 이용해서 ‘마오쩌둥 사상’을 폄훼하는 세력이 있다”며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이 발언은 그러나 천보다를 삼키는 태풍의 눈이 돼버렸다. 다음 날, 마오쩌둥은 린뱌오와 천보다 관련 토론을 중단시킨 후, 장고에 들어갔다. 거의 한 주 후 (8월 31일) 마오쩌둥은 짧고도 강력한 대자보 “나의 견해 하나”를 작성했다. 이 “대자보”에서 마오쩌둥은 천보다가 “동지들을 기만했다”고 비판하면서 분노의 언어를 쏟아 놨다.

<1969년 4월 초 제9기 인민대표대회에서 투표함에 투표하는 중공중앙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서열대로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공공부문>

“나와 이 ‘천재 이론가’ 천보다 사이에 함께 일을 도모한 30여년의 세월이 있다. 일련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우리의 의견이 합치된 적이 없었다. 조화로운 배합을 이룬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번에는 조화롭게 배합될 수 있었는데, 천보다는 돌연히 기습적 공격을 취해서 바람을 일으키고 불길을 지펴 혹시나 천하에 혼란이 없을까 저어하며 루산을 잿더미로 만들고 지구의 자전이라도 멈출 기세를 보였다! 역사가 및 철학가들 사이에서 그치지 않는 이 논쟁은 결국 우리의 지식이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유심론적 선험론이냐 유물론적 반영론이냐의 문제다. 우리는 오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만을 견지해야 한다. 천보다의 요설과 궤변을 뒤섞어선 절대로 안 된다.” (마오쩌둥, “나의 견해 하나,” 1970년 8월 31일)

마오쩌둥이 천보다의 발언을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부정하는 요설과 궤변으로 폄하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천재로 치켜세웠다는 표면적 이유였다. 불과 일주일이 못돼 중공중앙은 천보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선포했다. 전당이 동원되어 천보다를 비판하는 이른바 “비진정풍(批陳整風)”이 일었다. 특별조사팀은 천보다의 반혁명 죄행을 드러내는 대량의 물증, 증언 및 방증 자료까지 찾았다고 발표했다.

천보다는 순식간에 “마르크스주의자를 가장한 야심가, 음모가”로 전락했다. 해를 넘겨서 1971년 1월부터 천보다는 비참하게 짓밟혔다. 그는 공산당에 잠입한 “국민당 반동분자”로 류샤오치와 함께 반당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오명이 씌워졌다. 그는 곧 “반공(反共)분자, 트로츠키파, 반역도당, 특수간첩, 수정주의 분자”로 몰려 가혹하게 단죄되었다. 1971년 9월 13일 소련으로 달아나던 린뱌오의 비행기가 격추된 바로 그 날, 천보다는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됐다.

천보다 “문혁은 광기의 시대...그때 나는 미치광이”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천보다는 곧바로 다시 체포되어 “린뱌오 장칭 반혁명 집단” 재판의 주동인물로 18년 형을 선고받았다. 주군 마오쩌둥에 버림받아 이미 6년 가까이 영어의 몸이 돼 있던 천보다는 문혁 시절 주군의 뜻을 받들어 광란의 선전선동을 행했다는 이유로 다시 12년 간 복역했다. 1988년 10월 17일 만기 출소한 천보다는 이듬 해 9월 20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 유일하게 그를 방문했던 전기 작가 예융례(葉永烈, 1940-2020)에게 천보다는 회한의 일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1980년 11월 20일, 4인방과 함께 법정에 선 천보다의 모습: 왼쪽부터 장춘차오, 천보다, 왕홍원, 야오원위안, 장칭/ 공공부문>

“나는 큰 죄를 범한 사람이오. 문화대혁명 때 나는 미욱하기 그지없었소! 내가 진 죄는 너무나 크오. 문혁은 광기의 시대였소. 그때 나는 한 명 미치광이였소. 나의 일생은 비극이오. 나는 비극의 인물이오. 원컨대 사람들이 나의 비극에서 교훈을 취하길 빌 뿐이오.” (葉永烈, <<陳伯達傳>>, 제1장)

1970년 12월 18일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1972)와의 대담에서 마오쩌둥은 “지금까지 인격숭배는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약화돼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미 천보다를 자신의 “천재성”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유심론자로 몰아 비판하고 파면한지 100일 정도 지난 후였다. 1960년 내내 마오의 인격숭배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는 인격숭배의 광열을 제어하려 했을까?

문혁 이전부터 마오를 인격신으로 격상시키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두 인물은 군부의 린뱌오와 사상계의 천보다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오쩌둥 인격숭배가 강화될수록 린뱌오와 천보다가 권력도 공고해졌다. 인격숭배의 절대군주 밑에선 권신들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마오는 린뱌오와 천보다의 결탁을 보면서 두 사람 모두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군대의 수장 린뱌오와 이념의 리더 천보다가 합쳐지면 곧 “마오쩌둥” 자신이 돼버리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결탁을 해체하기 위해서 마오는 우선 천보다를 쳤다.

현 중국의 국가이념 ‘마오 사상'은 천보다가 정립한 것

독재자에 영혼을 팔아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재사(才士)는 영원히 복권되지 못했다. 1970년 천보다는 4인방의 주역인 장칭과 캉성 등에 맞섰던 이유로 정치적 사망을 선고받았다. 놀랍게도 1980년 그는 다시금 법정에 불려나와 4인방과 한 패로 몰려 다시금 역사의 칼날을 맞아야만 했다.

<문혁 포스터: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과 부주석 린뱌오가 홍위대를 검열하고 있는 장면/ 공공부문>

오늘날 중국 헌법 전문에 국가이념으로 명기된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가 인정하는 “천재적 이론가” 천보다가 정립한 중국혁명의 이론이었다. 시진핑 주석은 “마오쩌둥 사상”이 “중국 인민을 암흑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할 수 이게 지도해준” 이념이라 칭송한다. 한데 그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한 천보다는 스스로의 일생을 미욱한 인물의 광기가 빚어낸 비극적 과오라고 술회했다.

천보다가 저질렀다는 자신의 그 죄과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혼신의 힘을 바쳐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한 “사실”을 말할까? 아니면 그가 국민당의 특수간첩으로서 마오쩌둥에 반역했다는 문혁 시절 그에게 들씌워진 그 “혐의”를 인정하는 걸까? 곧 이어지는 린뱌오의 죽음 속에 해답이 암시돼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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