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하이엔드 발렌시아가 길거리 패션'을 알아?

한겨레 2021. 6. 1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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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낯선 사람][토요판] 김도훈의 낯선 사람
⑦ 뎀나 그바살리아
뎀나 그바살리아(오른쪽)는 길거리 패션을 명품브랜드 발렌시아가와 결합시켜 세계 패션계를 열광시켰다. 혁신해야 살아남을 길이 열린다. AP 연합뉴스

뎀나 그바살리아(뎀나 바잘리아)는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작은 국가 조지아에서 1981년 태어났다. 그의 이른 인생은 많은 옛 소비에트연방 국가 출신 젊은이들처럼 변칙적이었다. 조지아는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이었다.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은 없었다. 스탈린은 오히려 통치 내내 조지아의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당연히 조지아인들의 민족주의는 철권통치 아래서 몰래 강해졌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했다. 조지아 역시 독립을 선언했다.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전이 일어났다. 조지아 내 소수민족 지역인 ‘압하스’와 ‘오세티야’의 분리주의자들도 내전에 가담했다.

뎀나 그바살리아는 압하스 지역의 수도인 수후미에 살고 있었다. 꿈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도 불가능했다.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2001년 뎀나의 가족이 독일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잠깐. 당신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뎀나 그바살리아라는 고풍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이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긴 서사를 읊고 있냐고 말이다. 독일 유학을 끝내고 내전의 여진이 남아 있는 고향을 재건하기 위해 돌아온 조지아의 젊은 정치인이냐고? 그럴 리가. 뎀나 그바살리아는 패션 디자이너다. 패션 디자이너 소개 글치고는 서두가 지나치게 근엄하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 뎀나 그바살리아는 이름만큼이나 근엄한 서두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기존 패션산업을 뒤집은 ‘베트멍’

그의 이름이 패션계에서 소환되기 시작한 건 2014년부터였다. 프랑스에서 희한한 브랜드가 하나 등장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옷’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베트멍’(vetements·베트망)이라 불리는 브랜드였다. 좀 괴상했다. 재킷의 어깨는 부자연스럽게 솟아 있었다. 소매는 무릎까지 내려갈 정도로 길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새로운 패션이라면 나는 이제 패션으로부터 버림받은 세대가 되겠군.’ 예상은 맞았다. 나는 버림받았다. 베트멍은 곧 패션을 넘어선 일종의 사회현상이 됐다. 그걸 이야기하자면 ‘스트리트 패션’이 뭔지를 먼저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스트리트 패션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패션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를 패션계에서는 ‘하이패션’의 반대말로 사용한다. 샤넬, 지방시, 디오르 같은 20세기 초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은 오트 쿠튀르라 불리는 고급 맞춤복을 만들었다. 그 옷들은 무시무시한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상류층에게만 판매됐고, <보그> 같은 패션 매체를 통해서 중산층에게도 소개가 됐다. 결국 그것은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모든 계층의 의복에 영향을 미쳤다. 패션은 위에서 아래로 흘렀던 것이다. 이걸 좀 더 쉽게 설명하려면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패션 영화 중 하나의 대사를 인용하는 편이 좋겠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 잡지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를 하게 된 주인공 앤디는 편집회의에 참석한다. 미란다가 “드레스와 어울릴 벨트가 필요하다”고 하자 다른 직원이 똑같은 색으로 보이는 두 벨트를 들고 말한다. “두 색이 너무 달라서 결정하기가 어렵네요.” 앤디가 이 말을 듣고 피식거리자 미란다가 그 유명한 대사를 날린다. “너는 그 파란색 스웨터를 입고 지적인 척을 하고 있는데, 너는 네가 입은 색이 뭔지도 제대로 몰라. 이 색은 그냥 블루나 터쿼이즈색이 아니야. 정확히는 세룰리안블루지. 2002년 디자이너 오스카 드 라 렌타와 이브 생로랑이 세룰리안블루를 선보였고, 수많은 디자이너가 그 색으로 컬렉션을 출시해서 큰 인기를 끌었지. 니가 비웃는 그 파란색이 수백만달러의 수익과 일자리들을 창출했어.”

21세기가 되자 패션 산업은 역류했다. 아래에서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스트리트 패션’의 시대가 열렸다.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유행이 오히려 하이패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진화가 만들어낸 변화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이패션 브랜드들이 힙합을 좋아하는 청년이나 대학생이 입던 후드 티셔츠를 내놓기 시작한 건 스트리트 패션의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당신은 친구들은 다 입고 다니는데 왜 자기는 안 되냐며 50만원짜리 후드 티셔츠를 사달라고 울며불며 떼를 쓰는 아이들을 키우게 된 것이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패션계의 죄다.

뎀나 그바살리아는 바로 이 시기에 등장했다. 그가 2014년 만든 브랜드 ‘베트멍’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이엔드 스트리트 패션’이었다. 이 이해하기 골치 아픈 단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명품만큼 비싼 스트리트 패션’을 의미한다. 뎀나는 당시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입는 스타일을 마구 해체해서 패션쇼 무대에 올렸다. 그는 “지금 패션계는 재미가 사라졌다. 우리는 뭔가를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컬렉션도 남녀로 구분하지 않았다. 패션쇼 무대에 한번도 워킹을 해본 적 없는 일반인들을 올렸다. <타이타닉> 포스터 같은 게 엉성하게 프린트된 후드 셔츠를 50만원에 파는 이 브랜드는 순식간에 패션계의 새로운 열풍이 됐다. 지난 몇년간 지나치게 소매가 긴 후드를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을 길에서 보고 ‘이건 무슨 해괴한 유행이냐’고 속으로 불평한 적이 있다면 그건 다 뎀나 그바살리아 때문이다.

7년전 브랜드 ‘베트멍’으로 명성
산업의 역류현상 정확하게 읽고
길거리스타일 해체해 패션쇼 올려
상식 엎는 명품 세계적 유행시킨 뒤

발렌시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궁극의 하이패션 브랜드 성장시켜
우리 정치권 ‘이준석 현상’ 떠올라
혁신하는 브랜드만이 살아남는다

길거리 패션과 결합된 발렌시아가

베트멍의 인기가 절정에 오르자 생각지도 않았던 하이패션 브랜드가 뎀나 그바살리아에게 손짓을 했다. 발렌시아가였다. 스페인 출신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만든 ‘발렌시아가’는 1937년부터 시작된 브랜드다.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로부터 ‘완벽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품질이 완벽한 맞춤옷을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1972년 사망하자 브랜드는 금세 숨이 죽어버렸다. 이런 발렌시아가를 먼저 되살려놓은 것은 1996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디자이너 니콜라 제스키에르였다. 그는 26살의 나이로 발렌시아가라는 브랜드를 재정비했다. 다시 발렌시아가는 열광적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패션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대가 열린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그냥 디자이너가 아니다. 광고와 매장 디자인 등 브랜드 이미지 자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조정하는 직위다. 오래된 브랜드들은 깨달았다. 낡은 이미지로 쇠퇴해가는 브랜드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낡은 발렌시아가가 니콜라 제스키에르로 회생했다. 망해가던 구치 역시 1994년 (지금은 <싱글맨>이라는 영화의 감독으로 유명한) 톰 포드라는 미국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지휘로 부활했다. 젊은 피를 수혈하는 것으로 뇌사 상태의 브랜드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지금 한국의 백화점 1층에 구치와 발렌시아가와 디오르 매장이 거대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는 건 다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수혈하며 살아남은 덕분이다.

뎀나 그바살리아는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떠난 뒤 흔들리던 발렌시아가를 다시 쇄신했다. 첫번째 컬렉션은 충격적이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없었다. 이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파리처럼 시크한’ 발렌시아가도 없었다. 뎀나 그바살리아는 자신의 브랜드 베트멍에서 선보인 해체주의적인 스트리트 패션을 이 고급 브랜드와 접합해버렸다. 발렌시아가라는 이름은 궁극의 하이패션을 의미했다. 이 브랜드가 로고가 거대하게 박힌 후드 티셔츠나 모자, 스포츠웨어 같은 것을 팔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팔았다. 팔렸다. 불티나게 팔렸다. 나도 샀다. ‘발렌시아가’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는 모자와 티셔츠를 샀다.

어느 날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발렌시아가인가? 1937년에 맞춤복을 만들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만약 살아 있다면 이걸 발렌시아가라고 인정할까?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만들던 발렌시아가와 뎀나의 발렌시아가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브랜드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는 발렌시아가를 입는 것인가 뎀나 그바살리아를 입는 것인가? 정답은 없다. 다만 중요한 건 이거다.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과감하게 발탁하는 대담함이 없었다면 발렌시아가라는 브랜드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거대한 공룡은 젊은 피를 수혈하며 살아남았다. 결국 나로 하여금 다소 호들갑스러운 가격을 주고 로고가 그려진 모자를 사게 만들었다.

우리 정치에 그바살리아가 있다면?

최근 국민의힘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만났다. 1985년생 36살의 이준석은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중진들을 제치고 역사상 최연소 당대표가 됐다. 무려 43.8%의 표를 얻었다. 그는 여전히 거품인가? 많은 사람은 이준석이 안티페미니즘으로 20대 남성의 불만을 결집시킴으로써 다소 과장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준석의 토론을 듣고 있으면 그가 이야기하는 완전한 공정과 능력주의 사회라는 것은 일종의 환상에 가깝게 들릴 때가 있다. 한국의 진보가 그를 트럼프를 비롯한 해외의 여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준석을 한 세대의 분노를 먹고 자라난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생각했던 건 그가 당대표 선거에 나왔을 때 30대 정치인들의 반응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김남국 의원은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이준석이 갖고 있는 철학이나 정책 방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단순히 외부 요인 때문은 아니고 국민이 원하는 세대교체 바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 됐기 때문”이라고 이준석 열풍을 진단했다. 정의당의 류호정 의원은 “36세 이준석이 제1야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면 마흔이 되지 않아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40살로 제한되어 있는 대선 출마자 연령을 낮추자는 주장을 하면서 이준석 열풍을 인용한 것이다. 이건 어쩌면 이준석이라는 인물에게 어떤 문제가 있느냐는 두번째 고민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이준석의 무기는 확실히 하나다. 젊음이다. 그의 젊음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젊은 정치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감을 주고 있다. 게다가 20~30대 지지자들로부터 시작된 그의 열풍은 이제 모든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원내교섭단체 대표가 됨으로써 그는 지금 한국 정치의 가장 뜨거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아마도 뎀나 그바살리아는 몇년 안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지금의 발렌시아가는 잘 팔리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질려 하는 시기는 오고야 만다. 발렌시아가는 새롭게 떠오르는 더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낡아버린 발렌시아가를 구원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패션계는 그렇게 돌아간다.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혁신하는 브랜드들만이 살아남는다. 어제의 트렌드는 오늘이 되면 잊힌다. 내일의 트렌드를 읽을 줄 아는 혁신가가 필요하다. 많은 진보주의자의 입장에서 이준석은 뒤틀리고 비틀린 미래를 상징하는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새로운 세대는 뒤틀렸든 비틀렸든 그게 무엇이든 과거와 가장 멀리 결별한 미래를 보고 싶어 한다. 젊은 보수도 발렌시아가를 입는다. 젊은 진보도 발렌시아가를 입는다. 그건 발렌시아가가 패션의 미래와 가장 가까운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의 젊은이들이 동시에 묻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이제 됐다. 지금 한국 정치의 미래와 가장 가까운 당은 무엇인가?

▶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 패션 잡지 <긱 매거진>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17년간 써온 글 중 아끼는 것을 모아 2019년 첫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물다. 품격과 허영, 쓸모 있음과 없음, 옳음과 현실 사이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3주마다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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