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비 계속 줘야 하나요".. 반환소송 기각에 깊어지는 건설사 '한숨'

김송이 기자 2021. 6. 1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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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크레인 기사에 대한 ‘월례비’ 지급을 두고 중소 건설사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호남 지역 건설사들이 타워크레인 기사들을 상대로 그동안 지급한 월례비를 반환해달라며 청구한 소송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월례비 지급에 대한 법적 제재 가능성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월례비란 기초·골조 공사를 담당하는 하도급 건설 업체들이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주는 비공식 수고비다. 지역별로 월 250만~500만원 수준이다. 타워크레인 기사들은 하도급 업체로부터 “우리 공정부터 빨리 처리해 달라”는 명목으로 급여 외에 월례비를 받아왔는데, 일각에서는 ‘불필요한 관행'이라는 비판도 받던 터다.

건설노조가 타워크레인 총파업에 돌입한 8일 오전 서울의 한 재개발단지에 대부분의 타워크레인이 운행을 중단해 멈춰서있다. / 연합뉴스

12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광주지방법원은 호남 철근·콘크리트 협의회가 타워크레인기사 16명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지난 4일 받아들이지 않았다. 월례비가 부당이득금인 점은 인정하지만, 제출된 증거만으로 원고가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월례비 지급을 강제당했거나 원고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 반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2019년 호남 철콘협의회는 4개 타워크레인 업체 소속 타워크레인 기사 16명에게 지역 건설사 A가 2016년부터 3년 간 지급한 월례비 6억 5400여만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협회는 41개 건설사에서 지난 3년간 타워크레인 기사 최소 100명에게 준 월례비만 약 100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다만 관련자가 많아 우선 1개 건설사가 소송 주체가 됐다는 설명이다.

쟁점은 ‘강제성’ 여부였다. 대형 건설사 건설현장의 시공을 맡은 A사는 타워크레인 기사들과의 계약은 A사가 아니라 대형 건설사와의 사이에서 이뤄졌지만,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관행을 들어 시간외 근무수당 및 월례비 명목으로 월 약 300만원의 돈을 요구했다고 했다. 월례비 지급을 거부할 경우 기사들이 태업을 해 어쩔 수 없이 월례비를 지급했다고도 주장했다.

타워크레인 기사들의 입장은 다르다. 재판 과정에서 기사들은 ▲A사가 사용종속 혹은 파견 관계에 있는 기사들에게 근로를 지시하며 사용자 지위에서 지급한 임금 ▲도급 또는 위임 사무에 대한 보수에 해당 ▲용역 또는 위험부담의 대가와 사례금의 성격을 가지는 돈이라는 등의 이유로 월례비를 받은 것에 법률상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재판부는 기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A사와 기사들 사이에 도급·위임·용역 계약을 체결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어 월례비가 도급 또는 위임 사무에 대한 보수거나 위험부담의 대가와 사례금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기사들이 월례비로 상당한 이익을 얻고, A사에게 손해를 가했다”고 했다.

이어 “월례비 지급은 도급사나 타워크레인 회사가 부담하여야 할 인건비를 합리적 이유 없이 하도급업체인 철근콘크리트 회사에 전가하는 측면이 있어 부당하며, 월례비 지금은 근절돼야 할 관행으로 보인다”며 월례비가 부당이득금인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A사가 월례비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강제성이 확인되지 않아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이번 재판 결과가 다른 지역 철콘 협의회의 향후 소송 제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재판에서 중소 건설사들이 기사들에게 월례비를 지급한 데 대해 강제성이 인정돼 월례비가 반환돼야 할 ‘부당이득금’으로 판단될 경우 앞으로 월례비 관행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전국 철콘협의회는 재작년 7월1일부터 타워크레인 기사에게 매달 지급해 온 ‘월례비’를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일선 현장에서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양중작업(장비 등으로 중량물을 들어올리는 작업) 처리를 지체하는 방법 등으로 공사를 지연해 하도급 건설업체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월례비를 암암리에 지급해왔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다른 지역에서도 나오고 있다. 부산·울산·경남 철콘 협의회 관계자는 “전국 협회 결정 이후 타워크레인 노조의 반발이 거셌다”며 “타워크레인이 없으면 건설 현장에서 양중작업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허점을 이용해 10분 걸릴 작업을 20분 하는 식으로 정상적인 공사 진행을 방해해 지역 협회 차원에서 월례비 상한선을 300만원으로 정하고 지급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 지역 협회에서도 그동안 소속 건설사들이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지급한 월례비 현황 등의 자료를 모으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라며 “호남 협회의 소송 결과를 보며 소송 시점을 정할 예정이었는데, 청구소송이 기각된만큼 당분간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라고 했다.

대전·세종 일대에서 대형 건설사 공사현장 시공을 담당하는 한 건설회사 관계자도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월례비 거부에 대한 반발로 속도 지연 등의 준법 투쟁을 하다보니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가 막대했다”며 “공사 지연으로 인한 손해가 월례비보다 크기 때문에 전국 협회 결정과 달리 어쩔 수 없이 월례비를 지급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전·세종 협회는 월례비 상한선을 350만원으로 정했지만, 상한선이 무색하게 그 이상의 돈을 지급해야 했다”며 “회사 설립 후 10년 간 월례비로 나간 돈만 13억원이다. 지역 협회 차원에서 청구 소송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호남 지역 소송 결과가 좋지 않은 걸 보니 앞으로 월례비 관행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타워크레인 기사들의 입장은 다르다. 전국건설노동조합 타워크레인지부 한 지역 관계자는 “우리 조합 차원에서는 월례비 받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다”며 “월례비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회의에서도 조합원들에게 말하지만, 일부 회원들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알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도급 건설업체들은 월례비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를 준비 중이다. 기존에는 호남 철콘협의희 소속 A사만 소송의 주체가 됐다면, 현재는 다른 소속 회사도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준비 중이다. 호남 철콘협의회에 따르면, 타워크레인 기사들의 월례비 근절에 대한 자성의 노력이 보이지 않으면 A사 외 협회 소속 50개사가 증거를 수집해 개별적으로 반환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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