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열 없이도 아픈, 팬데믹의 계절 [책과 삶]

선명수 기자 2021. 6. 1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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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문학동네|392쪽|1만4800원

“나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음 붙일 곳 없는 낮에 대해서. 눈을 붙여도 잠들 수 없는 밤에 대해서. (…) 우리가 서로를 욕심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떻게 다시 고립되어갔는지, 그 외로웠던 봄에 대한 얘기를.”

코로나19라는 이름의 역병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지난해 봄. 사람들은 서로를, 또 자기 자신을 자주 의심해야 했다. 접촉은 전염에 대한 공포를 불러왔고, 확진자에게 책임을 묻는 듯한 혐오의 시선도 쏟아졌다. 최은미의 세 번째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에 수록된 단편 ‘우리 여기 마주’는 우리가 서로를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그 계절을 소환한다. 동시에 소설은 여전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다.

“그 봄에 나는 불특정다수의 방문을 원했고 불특정다수 모두를 의심했다. 그들과 접촉했다.” 소설은 팬데믹 시대, 자영업자로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인다. 화자인 ‘나’는 열세살 딸을 키우는 40대 여성이다. 퇴근하고 집에 와도 쉬는 기분이 안 든다는 남편의 눈치를 봐가며 향초와 천연비누를 만드는 ‘홈 공방’을 운영한 지 9년째, 마침내 동네 상가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작은 공방의 문을 연 참이다. 그러나 감염병 위기 경보가 ‘경계’에서 ‘심각’으로 상향되며 공방 운영은 위기를 맞는다. 수업이 대부분 취소되고, 남편의 월급도 삭감됐으나 공방 월세와 관리비는 꼬박꼬박 빠져나간다. ‘나’는 “여러모로 죄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소설가 최은미가 세 번째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을 펴냈다. 책에는 코로나19 시대의 살풍경을 발 빠르게 포착한 단편 ‘우리 여기 마주’를 비롯해 각종 문학상에서 호명받은 단편 9편이 실렸다. ⓒLuPan
“모두 의심했고, 접촉”한 작년 봄
의무로 가득 찬 일상을 살아내는
40대 여성 자영업자 삶을 통해
방역이란 이름을 빌린 혐오 등 그려
코로나 초기 풍경 소환한 ‘우리…’
성폭력 다룬 ‘눈으로…’ 등 9편 담아

하루하루를 불안감 속에 있던 화자의 공방에 수미가 찾아온다. 비슷한 또래 여자아이를 키우는 수미는 ‘나’의 공방에서 자신의 재난지원금을 써준 친밀한 이웃이자, “중소 학원 운영자들이 어떻게든 오래 잡아두고 싶어하는 그 ‘여자 기사님’ ”이다. 이번에도 다른 여자 3명을 데리고 공방의 ‘취미반 클래스’를 찾아 화자에게 도움을 준다.

수미가 운전만 하는 남자 기사와 달리 차량 승하차 도우미까지 하느라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 있다면, ‘나’ 역시 공방에서 “ ‘선생님’으로 생존하기 위해” “주부로서의 노동만을 선별해서 지워”야 한다. 그리고 그 둘 모두에겐, 일터에서의 노동뿐 아니라 “방역의 주체가 되라”고 요구받는 팬데믹의 시대, 엄마로서 요구받고 수행해야 할 노동이 있다. 화자는 중첩된 의무와 노동에서 오는 곤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선생님’인 그 순간에도 내가 알아서 감춰버린 그 노동에 얼마나 실시간으로 잠식당하고 있는지. (…) 나로 서 있기 위한 최소한의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 또다시, 계속 다시, 매일 다시, 내 노동을 지우고, 지운 것에 먹히고, 먹혀 가는 채로 지우면서, 편하게 사는 여자들 중 하나가 되는지. 왜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지워야만 내 실력을 신뢰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

소설은 이렇듯 모두에게 똑같이 찾아온 팬데믹이란 재난 속, 더 가혹한 잣대와 의무 속에 놓인 이들의 일상을 핍진하게 그려 보인다. 소설 속 여자들은 자신들이 “살짝만 당겨도 죽는 집단과 제대로 당겨도 죽지 않는 집단” 중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취미질’을 하는 공방에서 감염자가 나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누군가의 말에 수미는 답한다. “우린 아마 총살을 당할걸?”

그렇게 자신이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갈지를” 생각하던 화자 역시 이태원 클럽발 확산이 시작되자 동성 연인으로 추정되는 공방의 두 남자 손님에게 날선 반응을 보인다. “밤새 성토하고 찢고 찌르는 글들”이 넘쳐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풍경이다.

소설은 묻는다. “그 봄에 우리가 꿈꾸던 안전은, 우리가 겪었던 시국은, 같은 것이었을까.” 작가는 공공의 안전이란 이름으로 혐오와 낙인찍기가 독버섯처럼 자라나던, “발열 없이 계속 아팠”던 그 계절의 풍경을 발 빠르게 포착해 소설의 무대 위에 올렸다. 거기서 드러난 것은 ‘K방역’이란 찬사의 뒷면에서 “물줄기가 터져나오려는 호스의 입구를 한 손으로 틀어막고” 곪아왔던, 우리 안의 오래된 환부다.

<눈으로 만든 사람>에는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이 소설을 비롯해 여러 문학상이 호명한 9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표제작인 ‘눈으로 만든 사람’과 ‘나와 내담자’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등 3편은 어린 시절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성적 폭력을 입은 여성 인물의 생존기를 다룬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가정을 꾸렸어도 인물들은 여전히 폭력의 집요한 자장 속에 놓여 있다. 그 기억은 “기이할 정도로 끈질기게 잠복돼” 있다가 툭 튀어나와 삶을 뒤흔들고, 치유나 극복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오랫동안 갇혀 있던 폭력과 환멸의 세계에서 “자신을 비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을 통과해서” 빠져나오려 한다(단편 ‘내게 내가 나일 그때’). 3편의 단편은 각기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폭력 자체보다 그 이후의 부서진 삶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는 점에서 연작으로도 읽힌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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