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공부하는 연주자

함신익 기자 2021. 6. 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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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악보에 국한된 좁은 해석 말고

전방위적 시각으로 음악 봐야

호기심 상실이 가장 두려운 山

작품에 대한 끝없는 질문 중요

강도 높은 연습 게을리하지 않고

공부하는 시간을 귀하게 여겨야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 중 유일하게 악기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연주자 명단의 맨 위쪽에 포함되는 사람이 있다. 지휘자다. 지휘자는 악보에 내재해 있는 모든 악기의 세밀한 표현은 물론 연주될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배경, 철학적·미적 가치 등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함께 연주하는 악기 주자들도 똑같은 준비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철저히 준비된 연주를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많은 오케스트라가 있다. 연주를 준비하는 오케스트라들의 패턴도 각양각색이다. 리더가 추구하는 기대치(expectation), 도덕적 전통과 사기(orchestra morale), 습관적 연습의 농도(intensity of practice), 청중의 정결한 만족도(audience satisfaction)가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전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음악대학의 교수를 병행해 오면서 오케스트라의 디시플린(discipline;규율·기강)을 판단할 수 있는 경험이 다소 축적됐다. 오케스트라가 우수한 지휘자를 판단하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지휘자도 오케스트라를 판단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디시플린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리더십을 발휘하며 연습을 이끌어가는 게 쉽지 않은 일과다. 때로는 교육·훈련을 시키는 교관 또는 선생의 입장에서, 축 처진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응원단장으로서, 더 나아가 팬 서비스까지도 할 수 있는 엔터테이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연습을 이끄는 지휘자의 사명이다. 그러나 이런 역할이 한계에 부닥치며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지휘자와 연주자의 길은 이런 갈등을 해결해 나가며 지혜를 획득하는 길고 긴 여정이다.

이런 길을 여행하는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악보에 국한된 좁은 해석을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학문으로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 일상의 연구와 탐색의 결과가 남에게 성실하게 드러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연주자들이 심오한 다른 분야의 학문과는 다르게 악보만을 근거로 연주한다는 시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5년 전, 미국 예일대 학부생들의 오케스트라를 10여 년간 맡아 음악감독으로 지휘한 적이 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우수한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은 큰 자산이 됐다. 그들은 음악 외에도 인문학·경제학·과학·어학 등을 전공해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사회로 진출한다. 한국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커리큘럼 안에서 원하는 공부와 예술을 4년간 마음껏 즐기고 나간다. 그들의 학문적 호기심은 음악에도 계속돼 이론적으로 깊이 있는 치열한 토론으로 이어진 적이 많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대비하기 위해 폭넓은 공부를 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때 예일대 도서관에서 머물렀던 재충전의 시간은 학생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게 한 청초한 추억이다. 지금도 그때의 습관대로 음악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넘치는 열정으로 음악을 하는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은 축복이다.

음악가들이 넘어야 할 산은 무수히 많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운 산은 호기심의 상실이라는 산이다. 무엇 때문에 작곡가는 이 작품을 만들었고, 연주자는 어떤 방식으로 작곡가의 의도에 맞는 연주를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끝없는 질문이 이어지는 호기심의 산을 넘지 못하고 계곡이나 늪에 빠져 있는 연주자들을 대할 때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후, 음악을 전업으로 하는 대학원과 전문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오고 있다. 그러나 학부생들 같은 치열한 호기심으로 나를 긴장하게 하는 일은 드물다. 단순히 악보에 쓰인 대로 틀리지 않게 연주하는 데만 집중하거나, 심지어 편의 위주의 나태한 반복적 사이클에 익숙해진 음악가들을 종종 대하는 것이 아쉽다.

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목적과 가치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60세를 전후로 새로움을 발견하려는 학문의 목적에 차이가 있다. 젊은 시절 나의 연구하는 목적은,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가 알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상대방(학생 또는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필요한지 아닌지의 관심보다는 내가 무지하지 않음을 방어하기 위한 ‘유식의 허세’였을 것이다. 악보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일을 나의 자랑이요 업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반대로 요즘은, 내가 아는 것을 알리기보다 새로운 접근을 하고 있다. 연주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기본적인 팩트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두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나의 ‘지적 허세’는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이렇게 얻어낸 지식이 제한된 연습 시간 때문에 세밀하게 전파되지 못하더라도, 그들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고 믿고 있다.

내가 바라는 진정한 연주자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눈과 가슴을 가진 이들이다. 강도 높은 연습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홀로 공부하는 시간을 하루의 일상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연주자들이다. 공부하는 연주자가 많아진다면 대한민국의 음악계는 더욱더 풍성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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