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한독서]'어머니이자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김이경 2021. 6. 1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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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한독서]여여하다', 한결같다는 뜻과 무성하다는 뜻을 동시에 가진 말입니다. 김이경 작가가 추천하는 책의 숲 속을 천천히, 그리고 오래 산책해 보세요.
ⓒ한성원 그림

손이 아파 글쓰기가 힘들다. 자판을 치는 게 부담스러워 최대한 머릿속에서 문장을 완성하려 하지만 둔한 머리가 따라오질 못하고 결국 글쓰기는 오리무중의 고역이 되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동네 서점을 찾았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가 있다. 표지에 실린 작가의 흑백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늙고 왜소한 몸에서 뿜어 나오는 담담한 위엄, 그리고 손. 커다란 혹이 불거진 뒤틀린 손이었다. 젊어서부터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앓은 탓이라는데, 이런 손으로 시집 20여 권과 산문집 6권을 썼단다. 말문이 막혔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하버드 대학교 레드클리프 칼리지를 졸업한 1951년 첫 시집으로 ‘예일젊은작가상’을 받았다. 스물한 살, 더없이 화려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앞에 열린 탄탄대로 대신 굽고 좁은 길을 선택했다. 스물세 살에 결혼해 서른이 되기도 전 아들 셋을 낳았다. 십여 년간 분노와 애정이 교차하는 어머니의 삶을 살며 그는 “급진적인 사람이 되었다”. 1963년 페미니즘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시집 〈며느리의 스냅사진〉을 발표해 시인으로서 존재를 증명한 그는 이후 “예술은 사회적 존재”라는 믿음 아래 거의 일 년에 한 권꼴로 책을 펴냈다. 그가 새롭게 자신을 형성해가던 시절, 남편은 이혼하자는 그의 말에 자살로 응답했다. 끔찍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그는 묵묵히 그 시간을 견디며 어린 세 아들을 “낯선 것을 향해 마음을 여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키워냈다.

그가 빼어난 시인인 건 알고 있었다. 시 ‘강간’을 읽으며 여성의 육체와 정신에 거듭해서 폭력을 가하는 가부장제의 현실에 전율했고,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유명한 시구가 담긴 ‘며느리의 스냅사진’을 보고는 충격을 넘어 통쾌함까지 느꼈다. 그리고 눈물 나게 따스한 시 ‘헌사’. 자신의 독자들에게 “쓰라림과 희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뭐라도 들으려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하고, 다른 시들과 달리 매우 평이한 어투로 위로와 연대를 전하는 그 시를 읽고 에이드리언 리치가 왜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시인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이드리언 리치 지음바다출판사 펴냄

아이들에 대한 분노가 담긴 일기

하지만 솔직히 내가 그에게 이끌린 것은 탁월한 시인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살을 겪은 아들들과 유대감을 잃지 않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식의, 그것도 아들의 신뢰와 인정을 받는 어머니가 얼마나 드문지 알기에 놀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 힘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며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읽었다. 모성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대표작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경험과 제도로서 모성〉은 발췌문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한국어 완역본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까지 통독했다.

현학적인 글이 아님에도 읽기는 쉽지 않았다. 1971년부터 2009년까지 약 40년간 쓴 모든 글에, ‘예술(가)은 피와 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신념이 배어 있었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시대착오가 돼버린 걸 알지만 그 말을 쓸 수밖에 없는 글, 요즘 보기 드문 진실하고 간절한 문장이었다. 글 따로 삶 따로인 작가, 지식인들이 대부분이고 그걸 당연시하는 세상이지만, 그는 쓴 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불행을 이겨낸 모자간의 유대는 이런 간절한 진실에서 나왔으리라.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이드리언 리치 지음평민사 펴냄

시인이었던 그가 “산문을 규칙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정치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처음부터 그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글을 썼다. 처음엔 가부장제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침해당하고 침묵당해온 여성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글을 썼고, 점차 경계를 넓혀 “주변부에 살아가는 사람들, 권력이 없는 식민화된 사람들을 위한 길”을 내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인적인 것’ 혹은 ‘고백적인 것’이 사회적 맥락을 회피하는 치료적 장르라 싫다”라고 밝혔던 그가 내밀한 상처를 드러낸 것도 이를 위해서였다.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서 그는 아이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고스란히 담긴 자신의 일기를 공개했고, ‘피, 빵, 그리고 시’를 비롯한 여러 에세이에서는 ‘백인 중산층 여자아이,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유대인, 남성 시인을 전범으로 삼아 아버지를 위해 글을 쓰던’ 자신이 어떻게 레즈비언 페미니스트가 되고 ‘백인·남성·이성애자·유대인·중산층’을 넘어 ‘고통받는 사람들,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쓰는 사람으로 변화해갔는지 솔직하게 토로했다.

나도 해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식의 위로와 조언을 하기 위한 고백이 아니었다. 나와 당신,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피와 빵’이 갖는 위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넘어 연대하기 위해, 자신을 해부해 증거로 제시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된 뒤에도 그는 자신을 미완으로 여겼다. 자신의 삶과 작품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변화하는 중이니 독자들에게 더 나아가도록 함께하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1997년 클린턴 행정부가 국가예술훈장을 수여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바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예술은 공식적인 침묵을 깨뜨리고, 목소리를 외면당한 사람들을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는데,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의 야만적 영향력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는 정부의 “만찬 테이블을 장식하는 인질”이 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죽기 3년 전 발표한 ‘인간의 눈’에서도 그는 “경계와 침묵을 깨뜨리고 침묵당한 이들을 위해 혹은 그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시, “단지 세계의 거울이 아닌 세계의 일부분으로 작용하는 시”를 역설했다.

이제 나는 글쓰기가 힘든 것이 손가락 때문이 아님을 안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온몸으로 보여주었듯, 문제는 결국 삶이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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