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

한겨레 2021. 6. 11.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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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을 다른 말로 '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의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이란 어쩌면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외면했던, 하지만 이미 다 볼 수밖에 없었고 거쳐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삶의 일부를 그 시절로 돌아가 비로소 승인하는 순간을 이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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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의 시동걸기][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최지은 지음/창비(2021)

어린이의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을 다른 말로 ‘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지은의 시집을 읽다가 분명해진 생각이다. 시가 귀엽다는 얘기가 아니다. 실상은 그 반대다. 최지은의 시에서는 주변 공기의 움직임마저 감지할 줄 아는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턱이나 창문턱 정도 높이의 낮은 곳에서, 혹은 한 사람의 손길 아래에서, 다락이나 뒤뜰과 같이 눕기 좋은 구석진 곳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는 그 자리에서만 포착 가능한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미세한 날씨의 변화를 이뤄내는 작은 생물들, 이해하기 어려운 꿈 이미지 등이 시의 풍경으로 자연스레 포개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는 곁에 누워 나를 재웁니다/ 아이를 달래듯 뜨거운 이마를 한번씩 짚어주며// 너를 가졌을 때 이야기야,//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겨울 숲의 자두/ 새가 찌르고 달아난 자리로 단내가 풍기고/ 살짝 침이 고이기도 하는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는 열을 내려줍니다// 이내 나는 자두 꿈을 꾸며 더 깊은 잠에 빠지고// 어머니의 벌어진 앞니 사이로/ 흰 눈. 붉은 자두. 멀어지는 새./ 나의 여름이 시작되는 곳//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에선/ 통조림을 따는 소리가 들려오고/ 늦은 저녁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 문득/ 내가 세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다른 사랑을 찾아 집을 떠났는데/ 저녁을 하고 있는 어머니는 누굴까 생각하는 사이/ 또 한번, 통조림 뚜껑이 열리는 소리// 붉고 통통한 강낭콩이 우르르 쏟아집니다// 하얀 식탁보. 투명한 유리 화병. 흔들리는 꽃.// 고요가 생겨납니다// 나는/ 등 돌린 어머니의 몇걸음 뒤에 서/ 신이 나도록 떠들어보기도 하지만// 어머니께 무슨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있는 것인지/ 나는// 나만은 영영 알지 못합니다// 눈을 뜨자 내 곁엔 검은 개가 배를 드러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오늘은/ 나의 생일// 시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섞이어 풍겨옵니다// 이 여름이 한번 더 지나가도록// 짧은 꿈의 손님은 모른 척 숨겨두기로 합니다// 어두운 아침입니다”(최지은, ‘칠월, 어느 아침’ 전문)

시에서 “나”는 “어머니”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어머니의 “벌어진 앞니 사이”로 고인 슬픔과 꿈, 그녀의 침묵이 감추고 있던 표정과 무섭도록 진솔하게 마주했던 시절을 소환한다. “세 살”의 “나”는 “어머니”의 “등”을 “내”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했지만, “하얀 식탁보”와 “유리 화병”, 그 속의 “흔들리는 꽃”과 같은 낮은 높이의 시선으로 한 여성의 진실을 볼 줄 안다. 아니, 한 사람이 비밀을 품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나” 역시도 “나”의 고유함을 증명해주는 비밀을 품게 된 것이라고 위의 시는 말하는 것 같다. ‘어린이의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이란 어쩌면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외면했던, 하지만 이미 다 볼 수밖에 없었고 거쳐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삶의 일부를 그 시절로 돌아가 비로소 승인하는 순간을 이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른 척” 숨겨두지 못할 경험을 보유함으로써 “영영 알지 못”하는 “나”와 화해하도록 안내하는.

그러니, 이런 말도 덧붙여야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이들은 이곳의 어른들이 어떤 세상을 꾸리고 있는지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다고. 어른들이 함부로 낙인찍고 내칠 존재가 아니라고. 어린이들은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를 일러주는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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