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묵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2021. 6.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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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묵은 곡물의 낟알, 나무의 열매, 식물의 뿌리 또는 덩이줄기의 녹말에서 앙금을 받아, 풀을 쑤어 굳힌 음식이다. 메밀, 도토리, 녹두, 동부, 옥수수, 고구마, 밤, 고사리, 칡, 올방개 등은 그동안 한국인이 이용해온 묵의 재료이다. 박대, 상어, 장어 등의 생선껍질을 고아 굳힌 음식도 묵이라 이른다. 이는 생선의 콜라겐을 이용한 것이다. 네발짐승이나 조류에서 온 콜라겐도 묵과 같은 먹을거리가 된다. 우족이나 돼지족이나 닭발을 가지고 만드는 ‘족편’ 동아리의 음식 또한 원리는 박대묵 등과 같다. 우뭇가사리 같은 해조류의 카라기난과 알긴산을 잘 다루어도 묵이 된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한국인들은 그동안 윤기가 반들반들 돌고, 몰캉몰캉 씹어 넘기기 좋고, 특유의 기분 좋은 풍미가 느껴지는 먹을거리를 대개 ‘묵’이라고 했다. 이 가운데 곡물에서 온 묵이라면 메밀묵부터 떠오른다. 메밀묵은 양념장을 얹어 먹어도, 초고추장에 푹 찍어 먹어도, 김치를 송송 썰어 얹어도, 장국에 휙 말아도 메밀 특유의 구수함을 잃지 않는다. 아니 그 구수함을 잘 살린 메밀묵이야말로 잘 쑨 메밀묵이다. 그 원재료가 무엇이든, 묵 만드는 법은 한결같다. 센 불에서 끓이다 불을 줄이고, 갠 앙금을 서너 번에 걸쳐 적절히 풀어가며 잘 저어주는 것이다. 그래야 묵이 용기 바닥에 눌지 않으며, 앙금이 뭉친 알갱이가 생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눌면 탄내가 묵에 배고, 알갱이가 생기면 묵은 입속에서 기분 좋은 질감과 탄력을 잃는다. 미처 굳지 않은 뜨거운 묵을 급히 식히면 지나치게 꼿꼿해진다. 서늘한 곳에서 서서히, 넓은 용기에 펴 열기가 골고루 빠져나가게 해야 제대로 묵이 된다. 문득 묵 쑤는 분들께 송구하다. 묵의 원료가 될 가루며 앙금에 든 수고는 말할 틈도 없다. 책상물림이 한마디로 요약한 ‘제대로’라는 말은 그 노동의 세목과 섬세한 공력의 운용을 이루 다 담기 어렵다.

도토리묵 또한 메밀묵 못잖게 한국인에게 익숙한 음식이다.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한국인의 먼 조상들이 도토리를 먹어온 흔적이 전해진다. 한민족만이 아니다. 온갖 참나무에서 열린 갖가지 도토리 종류는 아득한 예부터 고대와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모든 민족에게 구황의 먹을거리였다. 고려 사람 윤여형(尹汝衡)은 ‘상률가(橡栗歌)’, 곧 ‘도톨밤의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도톨밤 도톨밤 밤이 밤은 아닌데 / 누가 도톨밤이라고 했나 / … / 시골 늙은이 마른밥 싸 가지고 / 새벽 수탉 울음소리에 일어나 도톨밤 주우러 가네 / 저 위태로운 만 길 산 위에 올라 / 덩굴 헤치며 온종일 원숭이와 다투다니…”

옛사람들은 산골짜기에서 도토리를 두고 야생동물과 경쟁했다. 도토리묵은 이렇게 얻은 자원을 인간적으로 먹는 방식이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안데스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옥수수와 고구마도 묵의 재료가 되어주었다. 특히 옥수수는 올챙이묵으로 변신했다. 바가지에 젓가락 굵기의 구멍을 숭숭 내고, 옥수수풀을 구멍을 통해 찬물에 흘려내리면 올챙이 모양 꼬리를 내며 뭉치거나 간신히 짧은 가닥이 난다. 이를 호로록 넘어가도록 해 먹으면 올챙이국수이고, 가닥을 건져 수분을 날려 굳히면 올챙이묵이다. 올챙이국수와 울챙이묵을 구분하지 않는 지역도 있다. 올챙이묵은 김치와도 잘 어울리고 깻국, 김칫국, 장물 등에 띄워도 별미가 되어주었다.

이 묵 저 묵의 구수함, 고소함, 심심한 듯 달큰한 맛, 쌉싸래한 가운데 개운한 맛은 누구에게나 부담 없이 다가왔다. 묵은 오랫동안 이어온 별미이자 수수하면서도 푸근한 음식이며 눈물겨운 대목까지 껴 있는 먹을거리이다. 대놓고 수더분해서일까?

묵에 관한 기록은 예부터 변변찮다. 그저 묵을 먹었노라 하는 쯤이다. 이에 묵을 두고 굳이 몇 자 적는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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