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 물의 꿈
[경향신문]
집에서 가까운 공원 한가운데에 호수가 있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정수한 뒤 다시 강 하류로 흘려보내는 인공호수다. 넓이가 30만㎡, 둘레는 4.9㎞라는데, 경험적으로 크기를 설명하자면, 50대 후반 여성인 내가 느긋하게 주위를 한 바퀴 돌면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정도다. 호숫가에는 군데군데 벤치가 놓여 있다. 이른 아침이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 아니라면, 빈자리는 거의 없다. 앉을 자리가 있나 눈여겨보다가 ‘매우’ 당연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벤치들은 예외 없이 호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호수가 잘 보이는 장소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돗자리나 야외용 의자를 갖고 온 사람들도 모두 물이 잘 보이는 자리를 선호한다.
오래전 청평호 근처에 살던 때 강이나 호수 주위로 하루가 다르게 음식점과 숙박업소가 들어서는 장면을 보면서, 물이 지닌 어떤 힘이 사람들을 끌어들여 먹고 자고 즐기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한 적이 있다. 단순히 물이 있는 풍경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1984년 미국 댈러스시에서 생활용수를 재활용하여 인공호수를 만드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만들어진 책 <H₂O와 망각의 강>에서, 이반 일리치는 말한다. “모든 물이 H₂O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물을 대하는 관점이 달라졌고, 그러한 역사에서 비롯된 상상력이 물이라는 물질에 형태와 의미를 입힌다는 것이다. 신화 속 레테강이 죽은 이의 발에서 기억을 씻어 내어 므네모시네 여신의 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그리고 죽을 운명의 존재들 가운데 신의 축복을 받은 이만이 기억의 샘물에서 건져온 이야기들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나는 상상해 본다. 죽은 이들이 건너가는 물 이야기는 아득한 강이나 호수, 바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힘들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공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물안개 자욱한 강변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며 알 수 없음의 신비에 빠져들 수 있던 사람들이 문득 부럽다.
이반 일리치는 댈러스시의 수도 배관 속을 흐르는 H₂O는 물이 아니라 산업사회가 창조한 물질이라고 강변한다. 눈앞에 있는 호수가 변기의 물을 정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을 수 있을까. 물의 분자식이 H₂O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부터 인간은 물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과학의 덕분에 위생적이고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나, 자연을 인간 사회와 분리된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착각이 시작되었다.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이나 수질 오염, 물의 불평등한 분배 같은 문제들의 이면에는 잃어버린 상상력, 사라진 물의 꿈 같은 공허함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앎이라는 것은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다소 거칠게 나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름 역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과 자신이 안다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까지의 앎을 되돌릴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따금 알아도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모름의 영역이 넓어지면 꿈의 지평도 넓어질 테니, 라고 감히 억지를 부려본다.
부희령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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