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이걸 녹음하고 버스 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판소리'

김정엽 기자 2021. 6. 10.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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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소리가 마지막이 되어부렀네….”

10일 0시 7분쯤 광주광역시 기독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구성지면서도 한 맺힌 목소리가 담긴 판소리 자락이 흘렀다. 소리의 주인공은 전날 오후 4시 22분쯤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서 재건축 중이던 5층 건물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모(61)씨였다.

이씨의 남편 한모(65)씨는 “오늘(9일) 오전에 이걸 집사람이 녹음했다”며 판소리를 들려줬다. 판소리 중 “오늘 걸음을 잘 걸은다. 이 돈 닷냥 가지고 가면 열흘을 살겄구나. 저 집으로 들어가면 여보 마누라 어디 갔소”라는 대목이 나오자, 한씨는 “평생 못 잊어. 이젠 노래도 못 불러…”라며 흐느꼈다.

한씨는 “판소리를 배우러 다니면서 진짜 재밌게 다녔당께. 자기가 배워서 나를 갈켜. (판소리)선생여 선생”이라고 했다.

한씨의 아내 이씨는 지난 9일 광주 증심사 국악전수관으로 판소리를 배우러 가는 길이었다. 이씨는 치매 예방을 위해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5분 이상 판소리를 하려면 가사를 외워야 하기 때문에 치매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나주 혁신도시에 사는 이씨는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2시간 거리에 있는 광주 증심사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수년 전부터 매주 3일은 꼬박 판소리를 배우는 데 시간을 보냈다.

이씨는 사고가 발생한 9일 오후 2시쯤 지하철을 타고 54번 버스로 환승해 증심사로 향했다고 한다. 평소엔 나주에서 02번 버스를 타면 증심사까지 바로 갈 수 있지만, 이날은 지하철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씨의 남편 한씨는 “오늘(9일)은 오후에 나가서 아마 지하철을 이용해 54번 버스로 갈아탄 거 같다”며 “왜 하필 이런 날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서 재건축 중이던 5층 건물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모(61)씨의 남편 한모(65)씨의 통화 내역./김정엽 기자

한씨가 붕괴 사고 소식을 접한 건 9일 오후 6시쯤이다. 뉴스에서 사고 소식을 들은 한씨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 이씨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후 6시 20분까지 전화를 5번 걸었지만, 아내는 받지 않았다.

한씨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위치추적 앱을 아내와 함께 휴대전화에 설치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내의 위치도 한참 동안 사고 장소 인근에 머물러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경찰에 문의를 해봤지만 “신원을 파악할 수 없다”는 이야기만 돌아왔다.

한씨는 답답한 마음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사고수습 지휘본부엔 ’60대 여성 추정-조선대병원' ’60대 여성 추정-기독병원' 이라고만 적혀 있었고, 아내의 이름은 없었다.

한씨는 먼저 조선대병원으로 향했다. 아직은 살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응급실을 먼저 찾았다. 하지만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씨는 광주 기독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독병원에서도 먼저 찾은 곳은 응급실이었다. 그런데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 명단에 아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장례식장으로 가 봐라”는 응급실 직원의 말이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장례식장에서 숨진 아내의 모습을 마주한 한씨는 “우리 아내가 아니다”라며 영안실을 나왔다. 온몸이 부어 있고 상처가 많아 아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나와 머리를 식힌 뒤 다시 영안실로 들어간 한씨는 아내의 신발을 보고 풀썩 주저앉았다고 한다. 한씨는 “내가 몇 달 전에 사준 운동화였당께”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광주광역시 건물 붕괴 참사로 목숨을 잃은 이모(61)씨의 남편 한모(65)씨의 휴대전화 위치추적 앱./김정엽 기자

이어 한씨는 위치추적 앱을 보며 “집사람이 떠난 지 7시간 지났네…”라고 했다. 한씨의 아내 이씨의 휴대전화는 사고현장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위치추적 앱에는 사고가 발생했던 9일 오후 4시 22부터 차곡차곡 시간이 쌓여가는 것이다. 한씨는 “이 시간이 계속 쌓여가다 언젠간 멈출 것”이라며 “시간이 멈춰도 아내가 항상 그곳에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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