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가을에 실종된 고고학자, 채병서를 '발굴'하다
고구려 조사 자료 품고 월남
연구성과 쏟아내며 활약했지만
익사설·월북설 등 소문만 남아
주홍규 박사, 삶·업적 최초 조명
"고구려 고고학 업적 재평가돼야"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날을 세우던 1967년 가을, 문화재 동네에 이상한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
전남 영암군 내동리의 옹관묘(독무덤) 유적에 경희대 발굴단장으로 파견돼 한창 작업 중이던 40대 고고학자가 갑자기 종적을 감춘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북한 평양 인근의 낙랑무덤과 고구려의 벽화고분을 조사했던 인물. 한국전쟁 직전엔 북한 문화기관 소속 공무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형은 일본 육사를 나와 대한민국 육해공군총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한 국군의 최고 수뇌부였으나 한국전쟁 때 전사했다. 이렇게 기구한 가족사의 내력을 지닌 채 전쟁통에 월남한 그는 1959년부터 국내 학계에 등장한다. 그 뒤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인상적인 발굴 조사와 연구 성과들을 쏟아내며 활약했으나 1967년 10월 조사 중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그의 생사 근황은 지금도 파악되지 않는다.
한국 고고학계에는 이런 곡절을 지닌 실종의 기억이 야사처럼 전해져온다. 그의 이름은 채병서(蔡秉瑞). 올해로 출생 100년째를 맞는 채병서는 평양에서 태어나 형인 채병덕 초대 육군참모총장(1916~1950)과 같이 일본에서 유학했다. 일제강점기 끝 무렵인 1941년과 1943년 오시마란 일본 이름으로 개명해 평양부립박물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고이즈미 아키오와 아리미쓰 교이치가 주도한 평양 진파리 고구려 고분과 석암리 낙랑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다. 해방 뒤엔 북한 정권의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역사고고학부 책임자로서 당시 월북한 고고학계의 거장 도유호, 한흥수와 ‘동수묘’란 별칭으로 더욱 유명한 황해도 안악 3호분 고구려 벽화무덤의 발굴 작업에 참여했다. 전쟁 이후 월남해 국립박물관, 고려대, 단국대, 경희대 등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품에 안고 온 고구려 고분 발굴과 벽화 연구의 조사 자료와 성과물을 남한 쪽 학계에 전수했다. 경남 울주군 삼광리 철기시대 무덤 발굴과 강화도 지석묘 조사 등 돋보이는 발굴 성과도 냈으나, 학계에서 뚜렷한 입지를 세우지 못한 채 역사의 저편으로 망각되어버렸다.
실종 이후 반세기 동안 그의 행적과 최후를 둘러싼 뒷얘기만 오갔던 이 고고학자의 삶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최근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논의의 물꼬를 튼 이는 한국 고고학사를 연구해온 주홍규 박사(영남대 강사). 그는 최근 역사학술지인 <백산학보> 119호에 실은 ‘해방전후 공간 속의 채병서와 한국고고학’이란 논고에서 채병서의 삶과 업적을 처음 조명했다.
채병서는 일제강점기의 고적 조사를 비롯해 북한과 한국에서의 발굴 조사를 두루 경험한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주 박사는 최근 일본에서 완본이 간행되고 국립박물관에도 일부 사료가 남아 있는 1941년 진파리 고구려 벽화고분 조사 기록과 1943, 1944년 석암리 낙랑무덤 조사 보고의 기록들을 검색한 결과 일제강점기 발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조선인 전문가는 없다는 통설과 달리 채병서가 발굴 실무를 주도하며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49년 진행된 안악고분군 조사도, 북한에서 1960년 간행된 안악고분군의 발굴 조사보고서에도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보고서의 간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점이 분명하다고 짚었다. 안악고분군 1차 발굴 조사 당시에 작성된 원본 자료 중 일부를 가지고 월남한 뒤 북한·중국·일본의 학계에 비해 안악고분군에 관한 관련 정보를 얻기 힘들었던 당시의 한국 학계에 처음 벽화의 세부 도상과 무덤의 주요 조사 내용을 처음 보고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에서 편년의 기준이 되고 있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의 무장 ‘동수’로 비정한 한국 학계 최초의 연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1961년 한국미술사학회가 발행하는 <고고미술>에 한국 학계에서 처음으로 방사능을 이용한 연대측정법을 고고학 조사에 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소개했고, 고구려왕릉 비정의 조건을 최초로 제시했으며, 고구려 무덤의 연대와 분류 계통을 처음 다룬 선구자였다는 게 그의 평가다. 주 박사는 논문에서 “비록 주류로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한국 학계에서 초창기 고구려 고고학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업적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왜 종적을 감췄을까. 최병현 전 숭실대 교수 등 원로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연줄이 없어 학계에서 소외된 울분을 폭음으로 달랬다고 전해진다. 행려병자로 숨졌다거나 실족해 익사했다는 등의 설들이 떠돌았던 배경이다. 주 박사와 강인욱 경희대 교수 같은 소장 연구자들은 다시 월북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월남 경위가 명확하지 않아 정보기관의 감시가 지속됐고, 실종 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연구실에 들이닥쳐 자료들을 쓸어갔다는 비화들이 전해지는 까닭이다. 실종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악명을 떨치다 훗날 망명해 실종된 김형욱임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강 교수는 “분단 상황에서 내부 분열을 거듭하며 기형적으로 성장했던 한국 고고학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채병서는 분단 고고학의 사생아 같은 존재였다”고 짚었다. 분단선을 넘어온 뒤 번민을 거듭했을 채병서의 연구 행적과 최후의 진실은 한국 고고학사의 복원을 위해 찾아야 할 숨은 퍼즐이라고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도판 주홍규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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