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도로 쪽으로 기우뚱.. 건물 붕괴 조짐 파다했다"

최은서 2021. 6. 1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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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 "예측 가능했던 참사" 한목소리
해체 진행 방향・보행로 방치 등 문제
당국, 붕괴 원인 규명할 합동 현장감식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합동 감식반이 10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지역 철거 건물 붕괴 현장에서 사고 현장을 감식하고 있다. 연합뉴스

"며칠 전부터 건물이 뭔가 이상하더라니까. 곧 우리를 향해 쏟아질 것 같았어."

10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4구역 재개발사업지엔 일부러 찾아왔거나 가던 길을 멈춘 시민 수십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전날 지상 5층 높이 건물이 철거 작업 중 무너지면서 17명이 죽거나 다친 참사가 벌어진 이곳에선 "사고 조짐이 일찍부터 있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관할 지자체에 안전 조치를 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위험이 뻔히 보이는 철거 작업을 강행한 업체들과 시민 보호 조치도 외면하며 이를 방관한 관청을,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성토했다.


"일반인 눈에도 위험해 보였다"

학동에 사는 A(40)씨는 붕괴 사흘 전 사고 건물을 봤을 때 이미 심상치 않았다고 했다. 도로에서 보이는 정면에 비해 측면이 한참 좁은 옛날식 건물이라 안 그래도 불안정해 보였는데, 이날은 확연히 앞으로 쏠린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A씨는 "설마 별일 있겠나 싶어 그냥 지나쳤는데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고 말했다.

일반인 눈에도 철거 방식이 이상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재개발구역 내 마지막으로 남은 건물이라 주변이 온통 공터인데도 왜 굳이 도로 쪽으로 쓰러질 위험이 있게끔 철거 작업을 했냐는 것이다.

사고 현장 인근에 사는 김모(46)씨는 "성토체(盛土體·중장비를 올려 작업할 수 있도록 조성한 흙더미)가 도로 반대편에 있는 게 내내 의문이었다"며 "건물 높이에 준하는 성토체가 건물 뒤쪽에 버티고 있으니, 기반이 약해진 건물이 받칠 것 없는 도로 쪽으로 쓰러지는 건 뻔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B(55)씨도 "건물이 뒤쪽이나 옆쪽으로 무너졌어도 인명 피해가 없었을 텐데 하필 앞쪽으로 넘어지도록 해체가 진행됐다"며 "제대로 된 전문가 자문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잇단 민원에도 지자체는 방관"

시민들은 상황이 이런데도 지자체가 별다른 안전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박모씨는 "아내가 건물이 무너지기 불과 2시간 전에 그 앞을 지나갔다"며 "평소 보행로 차단이 안 돼 있어서 불안했는데 아찔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고 말했다. 학동 주민 이모(46)씨는 "철거 과정에서 건물 자재가 인도로 떨어질까봐 3일간 일부러 길을 건너다녔는데, 아예 건물 전체가 무너지다니 충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주민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상황은 말도 안 된다"고 지자체를 꼬집었다.

지자체에 사고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60대 주민 C씨는 "아내가 출퇴근하는 길이기도 해서 동사무소, 구청, 시청 등 관공서에 여러 차례 안전 조치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며 "하지만 '알겠다'는 답변뿐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고 성토했다. 50대 D씨도 "시청에 민원을 넣으면 다시 구청으로 내려오는 식이라 소용이 없었다"며 "공무원들이 민원을 묵살한 것은 살인방조죄나 다름없다"고 질책했다. 동구청 홈페이지에는 사고 발생 지역의 안전 부실을 지적하는 민원성 글이 다수 게시됐다. 사고 발생 한 달 전인 지난달 10일 작성된 글에는 "가로수가 휘청이는 강풍에도 특별한 안전조치 없이 철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안전관리자의 현장 상주를 요구했다.


경찰·국과수 등 합동 현장감식

광주경찰청 수사본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사고 현장에서 합동 현장감식을 진행했다. 건물 붕괴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절차로 소방청,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전문가 자문단 등 총 18명이 참여했다. 서행남 광주경찰청 과학수사계장은 "철거 당시 건물 상태, 철거 작업이 건물 붕괴에 미친 영향 등을 면밀하고 종합적으로 감식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현장 작업자와 관계자들을 상대로 안전조치 의무를 이행했는지 여부도 수사할 방침이다.

동구청은 "철거 작업이 해체계획서대로 진행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구청은 관계 규정에 따라 이번 주 시공사와 감리자 측을 고발할 계획이다. 사고 당시 감리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지적과 관련해, 감리업체 선정을 담당한 학동4구역 주택재개발사업조합 측은 "상주 감리자를 선정한 것은 맞지만, 계약서에는 상주 여부가 명시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구역 철거 건물이 붕괴하기 4시간여 전인 9일 오전 11시 37분쯤 철거 공사 현장 모습. 건물 측면 상당 부분이 절단돼 나간 상태에서 굴착기가 성토체 위에서 위태롭게 철거 작업을 하고 있다. 광주경찰청 제공

광주=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광주= 원다라 기자 d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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