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고구려 (6) - 평양성 최후 전투
[고구려사 명장면-125] 9월 21일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된 후 군대를 이끌고 귀환한 문무왕은 11월 5일에 서라벌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이전인 10월 22일에 문무왕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포상을 내렸다. 그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실려 있는데,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하고 벌인 전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신라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한 기록이지만, 고구려군의 항전도 짐작해볼 수 있어 다행스럽다. 다른 역사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기록이기 때문에 다소 장황하지만 이를 인용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①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을, 김인문에게 대각간 관등을 내렸다. 그 외에 이찬과 장군 등을 모두 각간으로 삼았고, 소판(蘇判)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주었다.
② 대당 소감 본득(本得)은 사천(蛇川)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였던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은 평양성 대문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관등을 주고 조(租) 1000섬을 내렸다.
③ 서당 당주 김둔산(金遁山)은 평양 군영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의 관등과 조 700섬을 내려주었다.
④ 군사(軍師) 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北門)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의 관등과 벼 1000섬을 주었고, 군사 부양(斧壤)의 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의 관등과 벼 700섬을 내렸다. 가군사(假軍師) 비열홀의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고간의 관등과 벼 500섬을 내려주었다.
⑤ 한산주 소감 김상경(金相京)은 사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첫째였으므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 1000섬을 내려주었다.
⑥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 나아가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를 구하여 죽지 못했다.
위 기록은 각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에 대한 포상인데, 경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은 신라 왕경인들이고, 남한산, 비열홀, 부양 등 출신 지방을 밝히고 외위를 갖는 인물은 지방민들이다. 주로 신라 최북방 지역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들이 활약한 평양성의 여러 전투 현장들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천(蛇川) 전투, 평양성 군영 전투, 평양 남교(南橋) 전투, 평양소성 전투, 평양성 대문 전투, 평양성 북문 전투, 평양성안 전투 등이다.
여기의 사천 전투는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 있는 7월 16일에 신라의 본군이 한성에서 평양으로 북진하면서 치른 사천원 전투와는 다른 곳으로 짐작된다. 위 기록의 사천은 곧 사수(蛇水)로서 662년에 연개소문이 당 장수 방효태 군대를 궤멸시킨 바로 그곳이다. 현재의 합장강에 비정되고 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671년에 문무왕이 당의 장수 설인귀에게 보낸 '답설인귀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때 번방(蕃方) 군사와 중국 여러 군대가 사수에 모두 모여 있었는데 남건이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 승부를 결판내려 했습니다. 신라 군사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성 안은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수 전투가 평양성 포위 전투에서 승부의 분수령이 되는 격렬한 전투였던 듯하다. 위 포상 기록에서도 세 사람이 사수 전투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짐작할 만하다. 사수를 합장강에 비정해볼 때 이 사수 전투는 평양의 본성인 장안성과 대성산성이 서로 호응하는 방어망을 깨뜨리고 각각을 고립시키려는 전투였을 것이다.
앞의 공훈 포상 기록에서 평양소성 전투는 장안성보다 규모가 작은 대성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수 전투 이후 대성산성에 대한 치열한 공세가 벌어진 듯하다. 평양 군영 전투는 어떤 전투 상황인지 알기 어렵지만, 신라군 선발대가 당군 이세적을 평양 북쪽 20리에 있는 영류산에서 만났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아마도 영류산에 나당연합군 지휘소 군영이 마련되었던 듯하다. 평양성을 포위당한 고구려군이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서 이 영류산 군영을 공격한 전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평양 남교(南橋) 전투는 안학궁 남쪽에 있었던 시가지와 대동강 남쪽을 잇는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다. 이 다리 유적은 1980년대 초에 북한에서 발굴하였는데 대략 길이가 375m, 너비 9m의 나무다리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 신라군이 대동강 북쪽의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남교 다리를 둘러싼 전투가 치열했던 모양이다.
본성인 장안성에 벌어진 전투로는 평양성 대문 전투와 북문 전투가 거론되고 있다. 장안성은 4개 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다수의 성문이 있는 복합식 성곽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평양성 대문과 북문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평양성 대문은 가장 큰 외성으로 통하는 성문일 듯하고, 평양성 북문은 내성이나 북성의 성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평양성 대문과 북문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서 '자치통감' 기록대로 승려 신성이 배신하여 스스로 일부 성문을 열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여러 성문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당군의 규모로 보아 평양성 공격에서 신라군보다 더 많은 성문 공격을 맡았을 터인데, 아마도 다른 많은 성문에서도 공방전이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평양성 안 전투에서 신라 한산주 소감 박경한이 고구려 군주 술탈(述脫)을 죽인 공으로 포상받았는데, 군주(軍主)라고 하면 최고위 군사령관으로서 술탈은 아마도 평양성 방어를 책임진 최고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군주가 신라군 장수에게 희생되었을 만큼 평양성 함락 때에도 고구려군의 저항은 최후까지 격렬했던 모양이다.
앞서 언급한 문무왕이 보낸 '답설인귀서'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영공[당 이세적]이 신라의 용맹한 기병 500병을 뽑아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평정하고 큰 공을 이루었습니다." 이 기록은 아마도 신성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자 신라군 기병을 앞세워 성안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가리키는 듯하다. 나당연합군 합동 작전에서 당군은 위험한 전투에는 신라군을 먼저 내세웠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신라 측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 함락에 신라군의 역할이 적지 않았던 모양인데, 당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은폐하려는 혐의가 보인다. 나당연합의 균열이 읽히는 대목이다. 이는 후일 나당전쟁으로 비화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고구려 부흥전쟁과 관련해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치통감' 기사에는 9월 12일에 평양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마 이날은 보장왕과 남산 등이 항복한 날이고, 그 뒤에도 남건 등 많은 평양성 군민들이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위임 맡은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연 날이 5일 뒤인 9월 17일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에 의하면 9월 21일에 평양성이 함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당 기록과 신라 기록 사이에 어느 쪽에 착오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양측 기사를 모두 인정하면 17일에 신성의 투항으로 나당연합군이 평양성 안으로 진입한 뒤에도 5일여 동안 저항이 계속되다가 21일에야 겨우 평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이런 과정을 시시콜콜 짚어보는 이유는 고구려 평양성의 최후가 중국 측 기록처럼 허무할 정도로 무기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중원의 통일제국 수, 당과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승패를 주고받고 때로는 평양성이 적의 공세에 노출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동안 국운을 지키는 데 성공해왔다. 이런 나라에는 자기 공동체와 자부심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 수도의 함락이 나라의 멸망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고, 부흥을 위한 또 다른 항전으로도 전개된다.
666년 국내성에서 남생의 배신과 당 투항으로부터 시작해서 668년 9월 평양성에서 승려 신성의 배반으로 결국 고구려 국운은 끝을 맺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나라와 왕조의 멸망 기록에는 이런 배신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마치 이런 배신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본다면 또한 역사에서 그리 배우는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평양성의 최후가 비록 장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마지막을 초래하는 적잖은 요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게 무엇인지 탐색하는 게 역사의 몫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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