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살펴본 '2002 월드컵 영웅' 故 유상철의 축구 인생

박혜빈 2021. 6. 9. 23: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일전의 사나이이자 2002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대한민국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남은 레전드 선수
2019년 말 췌장암 4기 진단..투병 1년 8개월 만에 별세

[MHN스포츠 박혜빈 기자] '2002 월드컵 영웅'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투병 중에도 종종 근황을 전하며 건강을 회복한 듯한 모습을 보였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국 축구사에 굵직한 기록을 세웠던 고인의 삶을 키워드를 통해 살펴봤다. 

고(故)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한일전의사나이 

유독 한일전에서 좋은 기량을 발휘했던 유상철은 '한일전의 사나이'로 통했다. 유상철 특유의 투쟁적 플레이는 한일전에서 더욱 부각되곤 했다. 

그의 이름이 처음 국민들에게 각인된 것도 한일전이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 일본과의 8강전에서 유상철은 짜릿한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 경기는 아직도 역대 한일전 명승부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한일전에서 활약한 유상철은 일본 J리그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국내에서 모든 것을 이룬 유상철은 1999년 J리그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해 준우승에 이바지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치르고 친정 팀 울산 현대로 잠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2003년 다시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한 유상철은 팀의 J리그 2연패에 이바지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두번째 골을 성공시킨 유상철[사진=연합뉴스]

#2002월드컵주역

유상철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서 추가골(2-0)을 터뜨리며 한국의 4강 진출을 견인했다. 

당시 만 31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상철은 폴란드전을 시작으로 3·4위전(터키전)까지 7경기에 모두 나섰고, 올림픽 올스타 미드필더 부문에 뽑히기도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유상철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7일 오후 월드컵 공식 계정에 유상철의 국가대표 시절 사진과 추모 메시지를 올리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FIFA는 "한 번 월드컵 영웅은 언제나 월드컵 영웅"이라며 그가 "2002 한일 월드컵 때 한국 대표팀이 안방에서 4강 진출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소개했다. 

유상철 전 감독 애도 메시지 올린 FIFA 월드컵 계정 [사잔=FIFA 트위터 캡처]

#멀티플레이어

유상철은 현역 시절 한국 축구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렸다. 최전방 공격수부터 최후방 수비수까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뛰었다. 

응암초 4학년 시절 윙어로 축구를 시작한 그는 이후 미드필더를 봤고, '축구 명문' 경신중과 경신고를 거칠 즈음에는 공격수까지 커버했다.

1994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고 나서는 초창기에 오른쪽 윙백으로 뛰었지만 이후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중앙 수비수로 뛰었다. 물론 중앙 미드필더는 기본 옵션이었다. 

수비수의 근성과 미드필더의 재간, 스트라이커로서의 결정력을 모두 갖춘 그는 'K리그 베스트 11' 수비수(1994년), 미드필더(1998년), 공격수(2002년) 부분에 모두 선정됐다. 1998년에는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상철이 처음부터 '멀티 플레이어'로 칭송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창기에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선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축구선수로 성공한 이후에도 누군가는 유상철이 여러 포지션이 아닌 한 포지션에 집중했다면 더 뛰어난 선수가 되지 않았겠느냐고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포지션에서 최고가 되기보다는 축구선수로서 최고가 되고 싶어했던 유상철은 스스로 만족스런 선수 생활이었다고 자평한다.

또한 여러 포지션에 서본 경험은 은퇴 후 감독이 되었을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유상철[사진=연합뉴스]

#감독유상철

2006년 1월 현역에서 은퇴한 유상철은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2006년부터 KBS2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해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는데, 당시 7살이던 이강인(20·발렌시아)이 유상철의 지도를 받았다.

이강인은 "그때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축구 인생의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유소년들을 지도하던 유상철은 2009년 8월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의 초대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승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2011년 7월에는 왕선재의 후임으로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첫 프로 감독직을 수행했다. 

이강인이 올린 추모 글 [사진= 이강인 인스타그램 캡처]

2014년 초에는 울산대학교의 지휘봉을 잡고 여러 번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2017년에는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정식 임명되면서 5년 만에 K리그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8개월 만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후 2019년 5월 14일 부임한 인천 유나이티드가 유상철이 몸담은 마지막 팀이 되었다. 인천은 2019년 10월 19일 성남FC와 하나원큐 K리그1 2019 파이널B 34라운드 원정에서 1-0으로 이긴 뒤 10위로 올라서면서 강등권 탈출에 성공했다. 

성남전을 끝으로 그해 11월, 유상철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는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1부 생존을 위한 경쟁도 놓지 않았다. 

인천은 2019시즌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경남 FC와 비겨 10위를 확정하며 1부 잔류를 결정지었다. 유상철은 1부리그 생존 경쟁에 이어 병마와의 싸움도 이겨내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 

유상철 전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Copyright © MHN스포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