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도살자' 믈라디치 끝까지 반성이란 없었다

장은교 기자 2021. 6. 9.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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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형사재판소, 보스니아 대학살 주범에 종신형 확정

[경향신문]

라트코 믈라디치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왼쪽)이 1995년 4월 대량학살이 일어났던 보스니아의 블라시치산을 시찰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2~1995년 전쟁 과정서
세르비아계 사령관 맡아
무슬림 8000여명 학살 주도
2017년 유죄 판결 후 항소
“군인의 의무 수행했을 뿐”

1990년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에서 학살을 주도한 전 세르비아계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79)가 8일(현지시간) 국제형사재판소 최종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믈라디치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세르비아에선 그를 영웅시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헤이그에 위치한 유엔 산하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날 대량학살과 전쟁범죄 등의 혐의로 2017년 유죄판결을 받은 믈라디치의 항소를 기각하고 종신형을 확정했다. 믈라디치는 “군인으로서 의무를 수행한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믈라디치는 첫 판결 때 욕설을 내뱉으며 강하게 저항했지만, 이번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영국 언론 가디언은 전했다. 믈라디치는 유럽의 한 지역에서 남은 생을 복역하게 되는데,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등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무력분쟁을 겪었다. 특히 1992~1995년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전쟁은 동방정교회에 뿌리를 둔 세르비아계와 이슬람이 많은 보스니아계, 로마 가톨릭인 크로아티아계가 충돌하면서 피해가 컸다. 보스니아계는 독립을 추진했으나, 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군은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했다. 3년8개월간의 전쟁에서 약 10만명이 사망하고 200만명 이상이 난민이 됐다.

찍을 테면 찍어봐 대량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 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령관이 8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사진기자가 촬영하는 모습을 흉내내고 있다. 헤이그 | AP연합뉴스

유고연방 육군 출신인 믈라디치는 1992년 5월 세르비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1425일 동안 고립시킨 포위작전에 깊이 개입했고, 특히 1995년 소년들을 포함한 무슬림 8000여명을 살해해 2차대전 이후 가장 끔찍한 인종 대학살로 기록된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을 주도했다. 잔학한 수법 때문에 믈라디치는 ‘발칸의 도살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내전 종식 후 믈라디치는 16년 동안 도주 생활을 하다 2011년 친척집에서 붙잡혔다. 보스니아 내전과 관련해 160명 이상이 기소됐고 80여건의 재판이 진행됐다. 그와 함께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2019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영국에서 복역 중이다.

믈라디치를 생포해 기소한 검사 세르게 브람머츠는 “믈라디치는 현대사의 가장 악명 높은 전범 중 하나로 전쟁 범죄와 증오, 인간의 고통을 상징한다”며 “이번 판결은 피해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가족 22명을 잃은 또 다른 피해자는 “이번 판결은 보스니아계든 세르비아계든 자식을 잃은 고통을 겪은 모든 어머니들의 승리”라고 말했다.

믈라디치는 심판받았지만 유고연방에서 분리된 국가들 간의 분열은 여전하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판결은 세르비아의 일부 민족주의 단체들이 학살 책임을 부인하고 분쟁의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는 상황에서 나왔다”며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들이 영웅으로 칭송받고 믈라디치와 카라지치의 포스터가 공공장소에 등장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재판을 지켜본 한 수용소 생존자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눈에서 악마를 보았다”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증오와 분열의 이데올로기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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