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먹이려 성폭력 신고했다던데"..지휘관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임재우 2021. 6. 9. 2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군대 내 성폭력]전직 군 성고충전문상담관 근무 ㄱ씨
성추행 신고 부사관 극단적 선택에 대해 말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둘이 알고보니 사귀었다더라” “(가해자를) 물먹이려 신고했다던데”.

수년간 군 성고충전문상담관으로 일했던 ㄱ씨가 군에서 성폭력 피해자 지원 업무를 하면서 여러번 접했던 2차 가해의 언어다. 지휘관과 대화를 해보면 “두 마디가 끝나기 전에” 이런 말들이 나오곤 했다고 했다. 9일 <한겨레> 인터뷰에 응한 ㄱ씨는 군내 성폭력 사건들이 제도가 없어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군대에서 성폭력을 신고하고, 형사처벌까지 가는 1~2년 동안 누가 제일 다치는 줄 아세요? 거의 피해자들이 다쳐요.”

군 성고충전문상담관은 군내 성희롱·성폭력 관련 고충상담을 하고 사건처리 과정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피해자들이 가장 먼저, 가장 밀접하게 접촉하게 되는 군내 성폭력 전문가이기도 하다. 2014년 신설돼 전군에 걸쳐 48명(2020년 기준)이 활동 중인 성고충전문상담관은 군 안에서 독특한 지위에 있다. 피해자를 돕는 역할을 하면서도, 군 지휘체계에 속하지 않은 민간인이기 때문이다. 각군 양성평등센터의 업무 평가를 받고,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통상적인 지휘체계를 건너뛰어 참모장에게 곧바로 구두보고 한다. 군내 성폭력 사건 처리과정을 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군의 외부인인 셈이다. ㄱ씨는 성고충전문상담관을 “부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를 돕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2차 가해 만연한 군대

ㄱ씨가 직접 목격한 군내 2차 가해는 심각했다. “가령 피해자-가해자 분리 조처로 피해자가 부대를 옮긴다고 했을 때, 행위자(가해자)는 부대에 남잖아요. 그러면 가해자는 주변에 자기합리화를 위한 논리를 전파해요.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피해자가 강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보통 (상관인) 가해자는 20∼30년은 일했던 사람이니까 주변인들이 그 이야기에 영향을 받고, 가해자 논리가 계속 부대에서 떠돌아요. 그러면 군사경찰이 정작 조사를 했을 때 누구도 피해자를 위해 증언을 나서지 않게 되는 거죠.”

피해자에게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 “반대로 피해자가 남아있고, 가해자가 떠났다고 해서 좋은 케이스도 별로 없어요. 본인은 티를 안 내려고 웃고 다니면 웃고 다닌다고 관심을 보이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면 우울해보인다고 관심을 가져요.”

수사과정에서 분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남은 군생활 동안 가해자와 다시 마주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ㄱ씨는 성폭력으로 징계를 받았던 가해자가 몇 년 뒤 피해자와 같은 부대에 근무하게 된 사례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군인들 세계가 좁잖아요. 가해자가 2∼3년만 있으면 다시 같은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거죠.” 과거 성폭력 피해자들이 경험한 2차 가해와 군의 무심한 사건 처리 탓에, 다른 피해자들이 피해가 누적될 때까지 신고를 꺼리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ㄱ씨는 설명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성인지감수성 부족한 법무관 문제도

피해자 지원 제도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ㄱ씨는 피해자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되는 군 법무관 가운데 “열의 여덟은 성폭력 사건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다. “피해자와 국선변호사, 성고충상담관이 한 팀이 되어야 하는데, 성고충상담관이 사건에 관련해서 물으면 ‘당신이 뭔데 함부로 묻냐’는 식이에요. 피해자한테 연락도 하지 않고 혼자서 재판에 들어가기도 하고, 성고충상담관이 신뢰관계동석인으로 피해자 재판에 동석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ㄱ씨는 성고충전문상담관의 전문성 역시 확실히 담보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터놓았다. 2014년 제도 도입 초기 성폭력 사건 조사 과정을 면밀히 파악해야 하는 일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채 성고충전문상담관을 뽑았기 때문이다. “성폭력 문제를 직접 다루는 직책이기 때문에 성인지관점을 갖고 성폭력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뤄본 사람들이 근무해야 하는데, 단지 심리상담을 해봤다는 이유로 뽑혀 현장에서 혼란을 겪으시는 분들이 많아요.” 성고충전문상담관들이 내담자나 피해자들에게 성인지 감수성에 맞지 않는 정보들을 제공하는 일들이 간혹 벌어지는 이유다.

성고충전문상담관을 지원해야할 각군 양성평등센터도 소극적 역할에 머무른다. “상담관들이 지원과정에서 애로사항이 있다고 문의를 하면, ‘각 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요. 군내 거의 유일한 민간인으로서 독립적인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하는데, 센터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니 상담관들이 고립되고 소모되는 것이죠.”

최근 공군 부사관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인 이아무개 중사를 22차례 상담했던 해당 부대 성고충전문상담관과 공군본부 양성평등센터는 수사와 감사 대상에 올라있다. 유족 쪽은 성고충전문상담관이 이 중사에게 ‘2차 가해는 반의사불벌죄’라고 잘못된 안내를 했다고 주장한다. 공군 양성평등센터는 성추행 사건을 국방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군내 인식 바뀌지 않으면 제도 바꿔도 소용 없어”

ㄱ씨는 자신도 반복되는 군내 성범죄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다만 10명 이내 소수인원을 상대로 3번에 걸쳐 성인지 교육을 실시한 뒤 의식 변화를 경험한 적은 있다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의례적으로 하는 성인지 교육은 의미가 없어요. 원격교육은 틀어놓고 딴 짓하고, 대규모 소집 교육은 모아놓고 시간을 때우는 거죠.”

ㄱ씨는 공군 부사관 성추행 사건과 같은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만 요란하게 이어지는 ‘성폭력 특별 강조지시 기간’이 아니라, 군 내부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속적이고 내실있는 성인지 교육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성폭력 발생시 지휘관들이 피해자들을 상담관에게 연계하도록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시스템이 아무리 발전해도 의식이 따라가주지 않는 상황이에요. 성폭력 사건에 대한 군내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제도를 바꿔도 소용이 없을 거에요.”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