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사법 개혁 대신 동원된 '병영문화 개선'

박은하 기자 2021. 6. 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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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군 사법제도 재생산의 정치학' 논문 보니

[경향신문]

“사랑하는 딸아, 엄마가 몰라줘서 미안해” 공군 성추행 피해 부사관 이모 중사의 유가족들이 8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내 안치실에서 고인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군, 지휘권 약화를 빌미로 개혁 번번이 거부하며 ‘타협안’
김종대 전 의원 “병영문화 개선은 허상, 감시 권력만 강화”

지난 20여년 동안 군 관련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군 당국은 ‘병영문화 개선안’을 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7일 “병영문화를 개선할 기구를 설치해 민간위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병영문화 개선 기구를 중심으로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사건 문제 해결을 시도하면 오히려 평시 군사법원 폐지 등 제도적 해결과 멀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회학자 김경필·이수진씨는 지난해 10월 충남대 사회과학연구 31호에 실린 논문 ‘한국 군 사법제도 재생산의 정치학: 노무현, 박근혜 정부를 중심으로’에서 병영문화 개선을 기치로 내건 노력이 평시 군사법원 폐지 등 제도개혁과 맞물려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이 근본적 제도개혁을 막아내는 용도로 활용됐다고 분석했다.

필자들은 “많은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정치인들이 정파를 초월해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군 사법제도는 부분적 변화만 겪었다”며 “군과 국방부의 연합전략을 국회가 입법으로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논문에 따르면 군 사법제도 개혁 논의가 일어나면 “군과 국방부는 일선 지휘관들의 지휘권 약화를 논거로 정부안에 거부하며 타협안을 제시”해왔다. 국방부의 자체 병영문화 개선안이 오히려 제도개혁을 막아내는 군 타협안의 핵심이라는 지적이다.

2014년 육군 28사단에서 선임병들에게 한 달여 폭행·가혹행위를 당한 뒤 숨진 윤 일병 사건을 계기로 군사법원 폐지 논의가 일자 혁신위를 통해 병영문화 개선안을 내놓는 한편 군사법원법에서 군법무관이 아닌 사람이 ‘심판관’으로 재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삭제한 것이 단적이다. 군은 일치단결해 제도 변화를 막아서지만 국회의원들은 다른 이슈를 둘러싼 정쟁 과정에서 분열되는 데다 이 사안을 우선순위로 삼아 입법화에 주력하지 않았고 그 결과 군이 들이민 타협책이 입법에서 관철됐다는 것이다. 필자들은 “당정이 적극적으로 군 사법제도 문제점을 부각시켜 지지를 동원하고 야당이나 시민사회와 연합할 경우 제도가 빠르게 변화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실제로 국방부가 병영문화 개선을 목표로 한 기구를 설치하고 종합대책을 발표하는 일은 여러 차례 반복됐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국방부는 2000년 ‘신병영문화 창달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2005년 논산 육군훈련소 인분 사건과 연천 530 전방감시초소(GP) 총기난사 사건이 불거지자 범정부 ‘병영문화 개선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2014년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 구타 사망사건이 발생하자 민·관·군병영문화혁신위원회가 출범했다. 문 대통령이 설치를 지시한 병영문화 개선 기구도 큰 틀에서 2014년의 병영문화혁신위와 닮았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병영문화 개선은 허상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사무실에 남녀 장교가 단둘이 있으면 문을 열어놔라’ ‘회식 때 한 명은 당번병 역할을 하라’는 식의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이어지거나 군인의 퇴근 후 일상까지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군 지휘관이 각종 사건을 무마시켜 문제가 발생했는데, 병영문화 개선이란 명목으로 지휘관의 감시 권력만 강화된다는 것이다.

김 전 의원은 “군인이 일으킨 문제는 군 밖에서 수사와 재판을 하고, 지휘관은 재판에 개입하지 말고 그 결과에 따라서만 인사를 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이번 사건의) 핵심은 병영문화가 아니라 군 검찰이 사건을 은폐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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