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과 함께했던 '한국축구의 순간들'
[스포츠경향]
그는 모든 감독들의 워너비였다. 최후방 수비수는 물론 패스, 슈팅, 헤딩, 게임메이킹 능력에 최전방 해결사까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 설 수 있는 뛰어난 축구 감각의 소유자였다. K리그에 데뷔한 1994년에는 수비수로, 1998년엔 미드필더로, 2002년엔 공격수(1998년 득점왕)로 베스트11에 뽑힌 만능 플레이어에 리더십까지 감독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산 현대에 입단한 뒤 3년 만에 팀의 우승을 이끌며 일찌감치 한국축구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모든 면에서 특출나 오히려 그라운드에서는 평범해 보였다. 더 화려한 자리를 욕심낼 법도 했지만, 그는 소속팀에서나 대표팀에서 묵묵히 살림꾼 역할을 자처했다.
현역 시절 ‘유비’라는 별명으로 사랑받았던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췌장암 투병 끝에 7일 오후 향년 50세에 세상을 떠났다. 투병 사실이 알려진 2019년 인천 사령탑으로 정규리그 경남FC와의 최종전에서 극적으로 팀의 잔류를 이끈 유 전 감독은 ‘(건강하게 돌아온다는)남은 약속 하나도 꼭 지켜줘’라는 팬들의 현수막 응원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지력을 갖고 힘들더라도 잘 이겨내겠다”고 화답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유 전 감독이 현역으로 뛴 시간, 한국축구도 최전성기를 누렸다. A매치에서 18골(122경기)로 많은 골을 넣지 못했지만, 골넣는 수비수(혹은 미드필더)로, 두 팔을 벌려 환호하는 세리머리로 숱한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A매치 데뷔골부터 강렬했다. 역대 한일전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축구 8강에서 기록했다. 유 전 감독은 0-1로 뒤진 후반 16분 골문으로 쇄도한 한정국의 감각적인 힐 패스를 무릎으로 컨트롤한 뒤 오른발 슈팅으로 동점골을 넣어 극적인 반전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이후 황선홍의 추가골로 일본에 2-1로 승리했다.
1998 프랑스월드컵 조별예선 최종전 벨기에전에서는 ‘투혼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적 부진(2패)으로 차범근 감독이 중도 퇴진한 초유의 상황에서 유 전 감독이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추스렸다. 벨기에의 쉼없는 공세를 몸을 날려 막았다. 결국 동점골까지 넣었다. 0-1로 뒤진 후반 프리킥 찬스에서 하석주의 다소 긴 듯했던 패스를 유 전 감독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리를 뻗어 또하나의 명장면을 남겼다.
유 전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투사였다. 코뼈가 부러져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2001년 6월 월드컵 전초전으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때는 멕시코를 상대로 후반 헤딩 결승골을 넣어 한국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 뒤 유 전 감독이 코뼈가 부러진 상태로 뛴 것이 알려졌다. 선배인 홍명보(울산 감독)도 “승부욕과 투혼이 대단했던 선수”로 유 전 감독을 추억하는 장면이다. 2003년 한일전에서는 유니폼 전면이 찢어질 정도로 견제를 받으며 뛴 장면이 화제가 됐다. 현역 후반기에는 왼쪽 눈이 거의 실명된 상태로 선수 생활을 한 것이 알려져 팬들을 놀라게 했다.
유 전 감독의 가장 유명한 득점은 월드컵 4강 역사를 쓴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6월 부산에서 열린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서 1-0의 불안한 리드가 이어지던 후반 8분 유 전 감독의 중거리 슈팅이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유 전 감독 스스로도 “잊혀지지 않는 골은 한일 월드컵 골”이라고 말했다.
유 전 감독은 한일 월드컵에서 세계적인 스타 히바우두(브라질), 미하엘 발라크(독일) 등과 함께 대회 올스타 미드필더 부문에 선정되며 한국축구의 위상을 더 높였다.
이정호 기자 alp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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