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의 세상의 저녁] 후각의 세계와 예술

한겨레 2021. 6. 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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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세상의 저녁]전혜린은 1959년 2월28일의 일기에 "어두운 밤. 자욱한 안개, 별들의 냄새.."라고 썼다. 어떻게 별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그리움에 에워싸인 영혼이, 그 영혼의 후각이 아득히 먼 곳에서 어슴푸레 빛나고 있는 별들의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 ㅣ 소설가

사람의 감각 가운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후각이다. 보기 싫으면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고, 듣기 싫으면 귀를 막고,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지만 냄새가 싫다고 해서 코를 계속 막을 수는 없다.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공기 속을 떠도는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말 그대로 냄새의 홍수 속에 산다.

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후각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왼쪽 뇌를 억제하면서 창조적인 오른쪽 뇌를 자극하므로 후각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감정 농도가 다른 감각에 비해 훨씬 높다. 사람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만 종류를 넘어선다는 사실과,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도 만 종류를 넘어선다는 사실 사이에 어떤 연결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후각의 그런 성격 때문이다. 그래서 향의 역사가 인류 문명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을 것이다.

약물중독으로 후각이 일시적으로 예민해진 이에 대한 임상보고서에 따르면 마음속에 고감도의 카메라가 있는 것처럼 색채감각이 높아지면서 사물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생생하게 느껴졌고, 얼굴을 보지 않고도 냄새로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의 감정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냄새가 미적 감각에 커다란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기억력을 놀랍도록 높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3주일 후 후각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생생한 색채감이 사라지면서 흐릿한 세계, 구체성이 결여된 추상의 세계로 추방된 듯한 느낌과 함께 문명화의 대가로 인간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아프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후각의 성격이 예술적 상상을 통해 극단적으로 인격화된 인물이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르누이는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체취가 없다. 이 특별함은 그가 지닌 엄청난 후각 능력과 기묘한 짝을 이룬다. 그는 사물과 사람을 냄새로 인식하고 구분한다. 그에게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냄새를 모두 자신의 몸속으로 빨아들이는 행위다. 그 결과 냄새로 인지하는 세계의 풍요로운 실체에 비해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너무 궁핍해 자연스럽게 언어를 버린다. 그르누이가 선과 악 너머의 세계로 치닫는 것은 언어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비극은 세상의 모든 냄새를 다 맡는 그가 자신의 냄새만은 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에게 냄새는 세계의 본질이다. 이 본질이 자신에게만 없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는 허기를 불러일으켰고, 허기는 그를 파멸적 욕망의 늪으로 빠뜨린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의 흥미로움은 반지하방에 사는 사람과 빛이 충만한 집에 사는 사람, 그리고 지하에 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의 차이를 사건의 모티브로 한국 사회의 계층 구조를 시각화한 데에 있다. <기생충>의 주요 공간은 기택 가족의 반지하방과 글로벌 아이티(IT)기업 시이오(CEO) 박 사장 가족의 저택이다. 기택 가족은 반지하방의 삶에서 벗어나려고 자신들을 위장하여 박 사장 가족의 집에 ‘기생’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기택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만은 제대로 위장하지 못한다. 그 냄새는 박 사장에게 ‘선을 넘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비극의 단초가 된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공간을 함께 쓰게 되는 두 가족이 부조리한 희비극의 상황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박 사장 집의 지하에 근세라는 이름의 남자가 기생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근세는 부재의 사람이자 유령의 존재다. 그 유령이 딱 한번 박 사장의 어린 아들 다송에게 목격된 적이 있다. 한밤중에 냉장고 안의 먹을 것을 가지러 올라갔다가 우연히 다송의 시선에 닿은 것이다. 유령을 본 다송은 그 후 이상행동을 했고, 그것이 박 사장 내외에게 가장 큰 근심거리가 된다.

지하의 유령이 햇살 가득한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비극은 박 사장이 유령에게서 지하의 끔찍한 냄새를 맡는 순간에 일어난다. <기생충>에서 근세가 중요한 인물인 것은 유령이라는 메타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의 어떤 사회에도 유령은 존재한다. 인간 자체가 부조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유령이 지상의 사람들에게 부재의 존재인 것은 그들이 보려고 하지 않거나 보는 힘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생충>의 보편성이 드러난다.

후각은 자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각의 영역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다. 우리에게 허용된 미각은 단맛, 신맛, 짠맛, 쓴맛의 네 가지뿐이다. 이 단순한 감각만으로는 음식의 다채롭고 심미적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우리가 음식에서 느끼는 은밀하고 깊은 감각은 후각이 지닌 풍요로운 감각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맛의 실체는 미각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 느껴진다는 주장은 여기에서 나온다. 후각과 미각의 공감각적 세계가 물질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영역임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전적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명징하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어느 겨울날 ‘나’는 마들렌 과자가 녹아든 홍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어떤 감미로운 기쁨에 사로잡힌다. 그 기쁨은 사랑이 그런 작용을 하는 것처럼 귀중한 본질로 ‘나’를 가득 채우면서 ‘나’로 하여금 자신이 더 이상 우연히 죽어버릴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홍차에 녹아든 마들렌의 냄새가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맛본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라는 기억을 이끌어내면서, 그 냄새를 둘러싸고 있는 추억들을 ‘깊은 물의 심연에서 닻을 끌어올리듯’ 끌어올린 것이다. 이렇듯 냄새는 시간의 쉼 없는 흐름 속에서도 ‘연약하지만 생생하게, 비물질적이지만 집요하고 충실한 영혼처럼 살아남아’ 까맣게 잊힌 자신과 함께, 자신 속에 잠들어 있는 시간과 공간의 추억을 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혜린은 1959년 2월28일의 일기에 “어두운 밤. 자욱한 안개, 별들의 냄새…”라고 썼다. 어떻게 별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그녀는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끗한 것, 맑은 것, 정신만 있는 것, 창백한 것, 관념적인 것, 푸른 꽃, 대리석상, 중세, 죽음에의 동경과 삶에의 도취… 이런 여러 가지 색과 음향과 냄새가 일체가 된 혼돈이 내 영혼의 밑바닥에 깔려 있고, 나는 미칠 듯이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리움에 에워싸인 영혼이, 그 영혼의 후각이 아득히 먼 곳에서 어슴푸레 빛나고 있는 별들의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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