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근시와 보랏빛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1. 6. 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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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의 증가는 동아시아 젊은이들에게 특히 많이 보인다. 지나친 실내생활로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주요한 요인으로 밝혀진 바 있다. 픽사베이 제공

최근 책을 읽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 노인들에게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일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젊었을 때 치아 관리를 제대로 한 안 것”이라고 답이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매일 세 끼를 먹으면서 음식을 씹어야 하니 이런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하다.

내 경우는 걱정되는 장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눈으로 근시가 꽤 심하기 때문이다. 안경으로 교정하면 해결되는 문제라 예전에는 신경도 안 썼는데 수년 전 근시가 심할수록 백내장, 망막박리, 녹내장, 실명 등 심각한 안질환 발생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싸했다. 최근 이런 환자들이 늘고 있는 것도 근시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과 스마트폰 등 환경요인이 합쳐진 결과로 보인다. 

근시 증가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특히 동아시아는 악명이 높아 젊은이는 열에 여덟아홉이 근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TV를 가까이에서 본다거나 엎드려서 책을 읽으면 눈이 나빠진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뒤 지나친 실내생활로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게 원인으로 밝혀졌다. 동아시아의 아이와 청소년들은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다 보니 눈의 성장 패턴이 왜곡돼(안구가 앞뒤로 길어져) 초점이 망막 앞쪽에 맺히는 근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빛의 부족이 왜 안구를 비정상적으로 자라게 할까.

생후 21일 차인 어린 생쥐에게 한쪽은 도수가 없고 한쪽은 -30 디옵터인 콘택트렌즈로 만든 고글을 씌우면 오목렌즈 아래 눈이 근시가 된다. 이 방법은 근시 유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PNAS 제공

잠 깰 무렵 보랏빛이 중요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먼저 빛이 부족하면 눈에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안구 성장이 정교하게 조절되지 못해 근시가 된다는 동물실험 결과가 있다. 다음으로 햇빛 스펙트럼 가운데 보랏빛 파장이 정상적인 안구 성장에 중요하다는 발견이다. ‘보남파초노주빨’ 무지개색에서 알 수 있듯이 보랏빛은 가시광선에서 파장이 가장 짧은 영역이다(국제조명위원회에 따르면 360~400㎚).

국제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 6월 1일자에는 위의 두 설명이 다 맞고 서로 맞물려있다는 걸 보여준 일본 게이오대 안과학과 추보타 카주오 교수팀의 연구결과가 실렸다. 햇빛의 보랏빛이 망막을 자극해야 도파민이 충분히 만들어지고 그 결과 안구가 정상적인 형태로 자란다는 것이다.

추보타 교수팀은 지난 2018년 생쥐의 눈에 안경을 씌워 근시를 유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생후 21일 차인 생쥐(사람으로 치면 10살)의 한쪽 눈에는 도수가 없는 안경을, 다른 쪽 눈에는 오목렌즈를 씌우면 오목렌즈 쪽 눈의 안구가 앞뒤로 길어지며 근시가 된다. 오목렌즈로 초점거리가 길어진 빛에 맞추기 위한 적응이다. 참고로 근시일 때 끼는 안경이 오목렌즈다.

연구자들은 하루 중 언제 보랏빛을 쬐는 게 근시 예방에 효과가 있는지 알아봤다. 오후 8시부터 오전 8시까지는 빛이 전혀 없는 밤 조건이고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는 인공조명인 형광등이 비추는 낮 조건이다. 참고로 형광등의 스펙트럼에는 보랏빛 영역이 거의 없다. 따라서 보랏빛을 추가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3주가 지난 생후 42일 차(사람으로 치면 16살)에 오목렌즈 도수에 가까운 근시가 된다.

연구자들은 시간대를 달리해 보랏빛을 더했을 때 근시를 억제하는 효과를 알아봤다. 그 결과 낮이 끝나가는 오후 5시에서 8시까지 세 시간 동안 보랏빛을 더하거나 밤이 시작된 오후 8시에서 11시까지 세 시간 동안 보랏빛을 더했을 때 근시 억제 효과가 가장 컸다. 자연상태에서는 해 질 무렵으로 야행성인 생쥐가 깨는 시간대다. 

연구자들은 보랏빛이 정말 다른 파장의 빛보다 근시 억제 효과가 큰지도 확인했다. 오후 5시에서 8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같은 조도(빛 에너지 밀도)의 파란빛(파장 440~480㎚), 초록빛(500~540㎚), 빨간빛(610~650㎚)의 효과를 봤다. 그 결과 파란빛은 근시 억제 효과가 약간 있었지만 초록빛과 빨간빛은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보랏빛은 어떤 경로로 작용을 할까.

렌즈 유발 근시 조건에서 형광등 백색광(WL)에 보랏빛(VL)을 더했을 때 근시 억제 효과가 가장 크다. 파란빛(BL)은 다소 효과가 있지만 초록빛(GL)과 빨간빛(RL)은 소용이 없다. 아래는 안구의 앞뒤 길이로, 왼쪽은 도수가 없는 안경을 쓴 눈이고 오른쪽은 오목렌즈를 쓴 눈이다. PNAS 제공 

○ 뉴롭신, 보랏빛에 민감한 빛수용체

연구자들은 빛수용체의 하나인 뉴롭신(옵신5)을 주목했다. 생쥐와 사람의 뉴롭신 모두 보랏빛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파장 380㎚가 정점). 실제 생쥐와 사람에서 시신경인 망막신경절세포의 일부가 뉴롭신을 지니고 있다. 연구자들은 망막에서 뉴롭신 유전자가 발현하지 못하는 돌연변이 생쥐를 만들어 보랏빛의 근시 억제 효과를 알아봤다. 예상대로 변이 생쥐는 보랏빛이 있어도 근시가 됐다. 

지난 2015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생쥐 눈의 뉴롭신은 망막과 각막 세포의 생체시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2019년 나온 논문을 보면 뉴롭신이 도파민 재흡수를 조절해 혈관 발달에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연구는 뉴롭신 있는 망막신경절세포가 보랏빛을 받아야 이런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2019년 근시인 사람과 동물의 안구는 맥락막의 두께가 얇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구벽은 세 겹으로 이뤄져 있는데, 맨 바깥이 공막(흰자위)이고 맨 안쪽이 망막이고 그 사이가 혈관막(포도막)이다. 혈관막 가운데 수정체 주위의 홍채와 모양체를 뺀 나머지가 맥락막이다. 맥락막에는 혈관이 많이 분포해 망막에 영양을 공급하고 안압을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결국 보랏빛이 부족해 뉴롭신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하면 맥락막이 부실해져 안구가 탁구공에서 달걀 모양으로 변형돼 근시가 되고 망막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각종 안질환에 취약해진다는 말이다. 

이번 연구는 야행성인 생쥐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주행성인 사람에서도 재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생쥐 실험에서는 자연상태에서는 해 질 무렵을 전후한 시간대의 보랏빛이 근시 억제가 효과가 컸지만 사람에서는 해뜰 무렵의 보랏빛이 효과가 클 것이라고 저자들은 예상했다. 잠을 깰 무렵 보랏빛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뉴롭신은 빛 스펙트럼의 보랏빛에만 반응한다(위). 반면 형광등이나 LED처럼 파란빛과 빨간빛이 더해져 만들어진 보랏빛은 소용이 없다(아래). Prism Institute, 유튜브 캡처

인공조명 보랏빛은 소용없어

주로 실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보랏빛 결핍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실내 인공조명은 실외 햇빛에 비해 빛의 양이 훨씬 적고(다만 눈이 적응해 차이를 그만큼 못 느낀다) 그나마 보랏빛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백열전구는 태양처럼 흑체복사로 빛을 내므로 보랏빛 파장 영역이 약간은 있었지만, 오늘날 형광등이나 LED는 이 영역을 거의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리창이 넓어 낮에 햇빛이 꽤 들어오는 밝은 실내라도 자외선(UV) 차단 코팅이 된 유리라면 바로 옆의 보랏빛 영역도 거의 차단된다. 

실내에서도 보라색을 보는데 문제가 없으므로 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이 보라색에는 진짜 보랏빛이 거의 포함돼 있지 않다. 노란빛 파장이 없어도 양옆의 녹색빛과 빨간빛을 섞어 노란빛을 만들어낼 수 있듯이 파란빛에 빨간빛을 약간 더하면 보랏빛이 된다. 

보랏빛보다 파장이 약간 긴 파란빛과 훨씬 긴 빨간빛을 섞어서 보랏빛이 나오는 게 이상한 것 같지만 뇌는 색을 연속적으로 지각하기 위해 빛의 스펙트럼을 1차원이 아닌 2차원으로 지각한다. 빛 스펙트럼의 양 끝인 빨간색과 보라색이 가까운 색으로 느껴진다. 

보랏빛 파장이 포함된 보랏빛과 파란빛과 빨간빛을 더해 만든 보랏빛의 관계는 설탕과 아스파탐의 관계와 비슷하다. 둘 다 혀의 단맛 수용체에 작용해 달게 느껴지지만, 설탕은 소화효소가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해 에너지원으로 쓰지만 아스파탐은 대사돼 배출된다. 마찬가지로 두 보랏빛도 뇌에서는 보라색으로 지각하지만 보랏빛 파장이 포함된 보랏빛만이 망막의 뉴롭신을 자극해 근시를 억제하는 효과를 보인다. 

10여 년 전 파란빛이 멜라놉신(옵신4)을 통해 뇌의 기준 생체시계를 조절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늘날 실내조명이나 전자기기 디스플레이는 파란빛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낮과 밤에 다른 모드로 작동할 수 있다. 보랏빛이 뉴롭신을 통해 안구 형태를 조절한다는 이번 발견으로 수년 후에는 교실에 보랏빛이 보강된 조명이 설치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뉴롭신이 안구 발달에 영향을 주는 경로에 작용해 보랏빛을 대신해 효과를 내는 약물은 없을까.

사프란 꽃과 치자나무 열매

사프란 꽃(왼쪽)이나 치자나무 열매에는 카로티노이드인 크로세틴(오른쪽)이 들어있다. 2019년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207가지 분자 가운데 크로세틴이 근시를 억제하는 Egr-1의 발현을 가장 촉진했다. 크로세틴은 망막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추보타 교수팀은 2019년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츠’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런 물질을 보고했다. 사프란 꽃이나 치자나무 열매에 들어있는 크로세틴(crocetin)이라는 카로티노이드 분자다. 연구자들은 천연 및 합성 화합물 207가지를 대상으로 근시를 억제하는 유전자로 알려진 Egr-1의 발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봤다. 그 결과 크로세틴이 Egr-1의 발현을 가장 크게 늘렸다.

크로세틴이 0.003% 포함된 사료를 먹은 생쥐는 렌즈로 근시를 유발하는 실험에서 그냥 사료만 먹은 대조군에 비해 안구의 변형이 덜했다. 근시 예방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치면 하루에 음식을 1㎏를 먹을 때 크로세틴 30㎎을 섭취하는 셈이다.

흥미롭게도 크로세틴이 주성분인 사프란 꽃 추출물을 포함한 눈 영양제가 이미 나와 있다. 사프란이 시력을 개선하고 망막 건강을 유지시켜준다는 것이다. 2019년 논문의 참고문헌을 봐도 크로세틴이 망막의 혈류를 늘려 빛수용체와 망막신경절세포가 죽는 걸 막는다는 논문이 소개돼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먹고 있는 눈 영양제에도 사프란 추출물이 한 알에 20㎎ 들어있다. 지금까지는 건너뛴 날이 더 많았는데 이제부터라도 매일 챙겨 먹어야겠다.

아직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프란이나 치자 또는 정제한 크로세틴으로 근시 예방 효과를 알아본 연구결과는 없는 것 같다. 수년이 걸리는 실험이므로 지금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프란이나 치자는 수천 년 전부터 인류가 식재료나 약재로 써온 천연물로 밀리그램 단위로 먹으면 별다른 부작용이 없다. 10대 자녀가 안경을 끼게 되면 근시 악화를 막기 위해 사프란 추출물이 포함된 눈 영양제를 준비하는 건 어떨까.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2012년 9월부터는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9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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