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실습생 현장안전 '먼길'.."민호가 남긴 숙제 꼭 풀겁니다"

허호준 2021. 6. 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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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실습 중 산재 사고로 목숨 잃은 이민호군 아버지 이상영씨
지난달 26일 제주학생문화원 중앙광장에 세워진 아들의 추모 조형물을 찾은 이상영 노현넷 대표가 아들의 손을 잡고 쳐다보고 있다. 허호준 기자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쪼들리지도 않았다. 화물차를 운전하는 일이 끝나면 조기축구회에서 가끔 축구도 하고, 아이들과 외식도 했다. 친구 같은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2017년 11월9일, 그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평범한 소시민이던 그는 청년 노동자 문제와 노동인권에 눈을 뜨게 됐고, 현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난달 26일 제주시청 부근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상영(58)씨. 이씨는 2017년 11월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산업재해를 당한 뒤 세상을 떠난 당시 고교 3학년 고 이민호(당시 18살)군의 아버지다.

이씨는 이곳에 컴퓨터가 놓인 책상 하나를 받아안고 있었다. 반갑게 내민 그의 명함에는 ‘노동안전과 현장실습 정상화를 위한 제주 네트워크’(노현넷) 공동대표라고 적혀 있다.

지난달 14일 평택항에서 산업재해 사고로 숨진 이선호씨 부모를 위로차 찾은 이상영 노현넷 대표 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노현넷 제공

그의 왼쪽 가슴엔 ‘세월호’의 노란 리본과 ‘4·3’의 동백꽃 배지가 나란히 달려 있었다. 평범한 화물차 기사로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꿈꿨던 이씨의 삶의 방향은 바뀌어 있었다.

민호가 현장실습을 하다 크게 다친 2017년 11월9일부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19일까지 열흘 동안, 그리고 같은 해 12월6일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 회사 쪽과 싸웠던 기간, 그는 노동 현장의 모순에 눈을 떠갔다. 민호군 사고로 기소된 회사 대표는 재판에서 업무상 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공장장은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회사는 2천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씨는 화물차 기사로 섬과 육지를 오갔다. “세월호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3년 정도 자동화물트럭(4.5t)을 운전해 육지를 다녔어요. 트럭을 운전하고 나가면 2박3일 일정으로 올라가는데, 날씨가 나쁠 때는 4박5일 동안 묶일 때도 있어서 한 달이면 집에 있는 날이 열흘도 안 됐지요. 세월호 사고 나기 바로 전날 목포를 통해 제주도에 들어왔어요.”

세월호 사고가 나자 아내가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 장거리 육지 나들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지 이틀 만에 자동화물트럭 운전을 그만두고, 도내에서 운행하는 화물차로 갈아탔다.

이씨는 (2017년) 11월9일 오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전, 산업체 현장실습을 나갔던 민호에게 두번의 사고가 있었다. 처음에는 민호가 얘기를 하지 않고 일주일 정도 지난 뒤에야 휴대폰이 깨졌다며 바꿔야겠다고 할 때 사고가 있었던 것을 알았다. 두번째는 민호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때다. 흉부 충격 때문이었는데 입원시키지 않았던 게 실수였다.

“제가 민호가 실습하는 회사에 전화해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민호가 집에서 며칠 쉬고 있었는데 그날 민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기계가 고장 나서 생산라인이 멈췄다고 회사에서 나오라고 한다’는 것이었어요. 고교 실습생에게 기계를 고치라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3~4시간 뒤에 다시 전화가 와서 ‘아빠, 나 회사야’라고 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지난해 12월 민주당 제주도당사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이상영 노현넷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노현넷 제공

그날 오전 제주항에서 건설자재를 싣고 서귀포 혁신도시로 가던 그는 민호가 다쳤다는 전화를 받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동료 기사의 차를 빌려 타고 달렸다. “어떻게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넘어왔는지 모르겠어요. 병원에 도착했는데 민호 엄마와 형이 응급실 밖에 멍하니 선 채 ‘민호가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라고 해요. 들어가서 봤더니….”

침착하게 말을 하던 이씨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해 11월19일 민호에게 두번째 심정지가 오자 이씨는 의료진에게 “너무 힘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씨와 가족들은 그렇게 친구 같은 아들과 이별했다.

“민호 가슴에 손을 얹고 열흘 동안 견디느라고 고생 많았다고 했어요. 열흘 동안 민호가 견딘 게 아빠한테 숙제를 준 것 같았어요. ‘네가 남겨준 숙제를 아빠가 다 풀고 만나러 갈게’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들의 사고 경위를 알기 위해 회사 쪽과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를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 뒤 청년 노동자나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8~2019년에는 부지런히 육지를 드나들었다. 산업재해 사고를 당한 유가족들을 만나 위로하기도 했다. 한 달에 2~3차례 드나들면서 세월호 유가족과 반도체 피해자 모임인 반올림 유가족을 만나고 원진레이온, 용산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도 만났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손팻말 시위도 벌였다. 제주에서는 제2공항 반대 촛불집회 등 지역사회 현안이 있는 현장에 다가갔다.

지난달 14일에는 평택항에서 작업하다 산재 사고를 당한 청년 노동자 고 이선호씨 유가족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스러진 선호씨나 민호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선호씨 부친이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같은 아픔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화 통화보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낫지요. 저도 일을 당했을 때 제3자가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머릿속에 안 들어오고 같은 아픔을 가진 분들이 와서 한마디 하는 게 위로가 됐거든요. 아픔이 얼마나 큰지 제3자들은 모릅니다.”

민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된 2019년 11월19일에는 민호를 추모하고, 제주도교육청의 재발방지 의지를 담은 추모 조형물이 제주학생문화원에 조성됐다. 지난해 9월에는 노현넷이 출범했다. 노현넷은 민호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도내 26개 단체로 꾸려졌던 ‘현장실습 고등학생 사망에 따른 제주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중심이 돼 설립됐다.

이상영 노현넷 대표. 허호준 기자

노현넷은 현장실습 제도를 포함해 제주지역의 산업재해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와 감시, 노동인권 보장, 대안 제시 등을 할 계획이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청소년 노동인권 활동가 양성을 위한 노동인권 교육 내부워크숍도 오는 7월까지 이어진다.

노현넷 쪽은 “민호 사고 이후 전국적으로 추모 물결이 일고 현장실습 제도에 대한 개선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면서 교육부는 선도기업 인증제도를 도입해 인증된 기업에 학생을 파견하고 학생 중심으로 운영하는 ‘학습 중심 현장실습’을 운영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선도기업에 대한 조사 권한 미흡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씨는 “민호 사고 이후에도 고등학생들의 현장실습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다”며 “2015년부터 2020년까지 5인 미만 업체에 현장실습을 나간 적이 있는지 실태 조사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교육청 쪽에서는 없다고 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산재 사고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4월22일 평택항에서 일어난 이선호씨 사고 이후에도 산재 사고로 노동자들이 스러졌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누리집에 나온 ‘사망사고 속보’를 보면 지난달 26일 이씨를 취재한 날부터 7일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20명이 산재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제주학생문화원 중앙광장에 세워진 고 이민호군 추모 조형물은 이군이 오른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다시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연대하자는 의미이다. 그 앞에 새겨진 시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산업사회의 구조적 병폐에 희생당한, 이것은 사회적 타살이다. 부모의 마음 또한 압착되고 짓이겨졌다. 이 모든 책임은 어른들의 책임이고,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이다. 실습생인들 왜 꿈이 없겠는가. 청춘은 미래 자체가 벅찬 꿈이 아니던가.”(시인 김경훈의 ‘꺾이지 않을 청춘의 숲을 위하여’)

기자와 함께 아들의 추모 조형물을 찾은 이씨가 왼쪽 가슴에 ‘실습생 이민호’라고 쓰인 이름표를 단 아들의 손을 붙잡고, 쳐다봤다. “아들아, 너와의 약속을 지킬게.”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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