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하나, 여럿, 그 너머
글로벌 패밀리-다문화 가족
차이는 무엇인가
독립영화는 왜 다양성영화인가
보편성의 대안은 다양성이 아냐
‘다양한 여럿’은 각기 평등하지 않아
보편성의 기준 ‘해체’가 곧 융합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
가족, 글로벌 패밀리, 다문화 가족?
위 소제목들은 현재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족을 칭하는 말이다.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수식어가 없다. 그냥 가족이다. ‘그다음에야’ 이혼, 한 부모 가정, 조손 가정 등을 두고 정상 가족 논쟁이 오간다.
대개 글로벌 패밀리는 백인 남성이 한국 여성과 결혼한 경우다. 이에 비해, 다문화 가족은 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한 외국 여성과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한국 남성의 결합을 말한다. 글로벌 패밀리나 다문화 가정도 ‘비정상 가족’이 있을 텐데, 이들에겐 한국 사회에 적응 여부가 주요 쟁점이다.
굳이 국가 경계를 정한다면, ‘국제결혼’은 한국 여성과 결혼하든 한국 남성과 결혼하든 모두 글로벌 패밀리 혹은 다문화 가정이어야 한다. ‘베트남 신부’는 다문화, ‘미국 신랑’은 글로벌인가? 이는 인종주의, 남성 중심주의, 국가 간 위계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한국 가족 구성원 사이의 이질성, 즉 ‘다양한 문화’는 남편의 폭력이나 고부간 갈등, 여전한 명절 스트레스, 높은 이혼, 별거율로 이어진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기 입장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가족은 다문화 가족이다. 하지만 다문화는 한국인 외부에만 적용된다. 오히려 가족 내부의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충돌은 한국 가족에서 훨씬 빈번하게 일어난다.
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unit)로 보고 가족 구성원 전체를 한 묶음(“우리는 하나”)으로 간주하는 가족주의는 가능하지 않다. 이성애 가족은 성별, 세대 차이가 주요 모순으로 부부끼리 존중과 배려가 넘치고 부모 자녀 사이에 대화가 원활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가족 구성원의 분업과 위계 때문에 누군가의 희생이 필수적이고 한(恨)의 문화를 낳는다. ‘한’과 울화는 예전 어머니들만의 사연이 아니다. 가족, 사회, 학교 제도의 구조적 억압 속에서 ‘한 맺힌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가.
범주(範疇, category) 설정은 개념을 인식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다문화 가족의 전제는 문화의 기준은 하나이고, 그 하나는 한국이라는 우리 중심적 언설이다. 국제 가족은 문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농어촌의 다문화 가족에게는 이주 여성을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에 동화시키려는 일반의 인식과 공식적인 정책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처럼 다양성은 다양한 가치가 아니라 ‘하나’를 중심으로 배제된 나머지를 말한다. 독립영화를 ‘좋은 의미로 포장하여’ 다양성 영화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다. 그렇다면, 주류 상업 영화의 내용은 다양하지 않다는 말인가.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제3세계 페미니즘을 동렬항으로 분류하는 방식도, 제3세계에는 제3세계 페미니즘만 있다는 논리다.
각각의 다양성은 평등하지 않아
애초에 융합이 제기된 이유는 학과들의 독자성, 배타성에 대한 소통의 요구에서라기보다, 보편성에 대한 비판에서였다. 보편성은 일반성, 중립, 과학, 합리성, 상식으로도 불리는데, 사회를 조직하는 핵심 원리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하나라는 보편적(uni/versal) 규범은 바람직하지도 실현되지도 않는다. 사회는 거대한 하나의 돌, 일괴암(一塊岩, mono/lith)처럼 변화 없는 단일한 조직이 되기 쉽다. 삶의 다양한 상황을 어떻게 보편의 이름으로 통합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근대 초기의 보편성은 모든 인간이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의미였다. 권리와 의무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겠다는 계몽의 의지였지만 이는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보편성의 기준이 여러 개일 수는 없으므로 기준이 정해졌고, 그 내용은 중산층 남성이다. 보편성을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한국 사회의 ‘수저’ 논란처럼, 기회의 평등은 조건의 불평등 앞에서 의미가 없다. 계급, 인종, 젠더 등이 우리를 보편의 영역에 입장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여러 가지 버전, 다양성(poly/versal)이다. 일상생활이나 정치적 발언에서 다양성처럼 듣기 좋고 부담 없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논쟁을 덮어버리는 도구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우리는 단지, 다를 뿐이야!” 탈정치의 세련된 방식이다. 문제는 각각의 다양성이 평등(fairness)하지 않다는 데 있다. ‘다문화 가족’은 다양성이 차별로 전락한 전형적 사례다. 유색 인종이나 동성애자에게 “다양성을 존중하자”, “개인의 선택이다”라는 태도는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관용, 배려는 스스로 우월한 위치를 설정하고 방관하는 태도를 말한다.
지난달 26일, 문화체육관광부가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제1차 문화 다양성 보호 및 증진 기본계획’(2021~2024)은, “나는 흑인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 엉뚱한 오해를 샀다. 문체부는 차별 표현의 사례로 미망인, 흑형, 결정 장애, 틀딱 등을 제시했는데, 일부 시민들은 이를 “국가의 언어 사용 규제”라며 항의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권장사항일 뿐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흑형’(黑兄)을 두고, ‘형’은 친근한 우리말이며 흑인을 흑인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냐고 반발했다. 흑형은 ‘흑’과 ‘형’의 아름다운 만남이란다. 그러나 “백형”(白兄)이나 “흑누나”라는 말은 없다. 백인이 한국인에게 ‘노란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양성인가?
이처럼 다양성(여러 개)의 옹호는, 보편성(하나)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여러 개’의 가치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평등한 드문 경우로 무지개가 좋은 예이다. 빨주노초파남보는 모두 다른 색이지만, 연속선을 이루면서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같은 영역(range)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말하는 ‘여러 개’는 평등하지 않다. ‘여러 개’의 나열이 융합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다양성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이 필요
다학제, 융합적 사유의 선두는 여성주의였다. 아니 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융합적 사고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이 ‘제2의 성’임을 항의하기 이전에, 인간이 왜 남녀로 왜 구분되는지에 관한 의문 즉 차이에 관한 절실한 문제제기였다.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서 오래전부터 제외되어왔기 때문에 언제나 보편성 적용의 첫 번째 탈락자였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인문학의 핵심은 차이에 대한 논쟁이고 이를 논한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은 ‘석학’으로 등극했지만, 모두 여성주의에 빚지고 있다.
당연히 하나의 기준(uni/versal), 다양한 기준(poly/versal)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와 ‘여러 개’를 극복하는 융합으로서 횡단의 정치(trans/versal), 연대의 정치(coalition), 유목적 사유(과정적 사유)가 등장했다. 이것이 융합이다. 니라 유발 데이비스, 퍼트리샤 힐 콜린스, 로지 브라이도티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모두 번역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에 기록될 명언,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다.” 1984년에 창립된 여성운동단체 ‘또 하나의 문화’가 외쳤던 이 언설을 생각하면 당대 여성주의 언어는 후퇴했다. ‘또 하나의 문화’의 영어 표기(Alternative Culture)에서 보듯, “또 하나”는 다양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대안적이라는 의미다.
분단 체제는 남북으로(둘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적대적 공존이라는 하나의 강고한 통치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라는 기존의 경계가 해체됨으로써, 진정한 여러 개가 드러나는 새로운 사회다.
최근 송혁기 교수는 융합의 필요와 우려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융합이라는 화두가 자칫 주체(자기 분야)를 확보하지 못한 채 흐름에 휩쓸려,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는 세태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경향신문> 6월2일치, ‘융합이라는 화두’)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대개, 융합을 자기 분야를 확실히 안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자기 분야는 특정 학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이 필요로 하는 정치적 입장, 새로운 가치관이다. 나의 질문, 융합의 질문은 이것이다. “자기 분야”란 무엇인가, 자기 분야의 내부는 동질적인가, 자기 분야는 어떻게 ‘자기’를 구성해 왔는가. 하나(“자기 분야”)는 무엇을 취하고 버리면서 만들어졌는가. 그 과정을 밝히는 실천이 공부 방법으로서 융합이다.
정희진.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속보] 대검 “직접수사 제한 조직개편, 수용 어렵다” 공개 반발
- 코로나 신규 확진자 454명…1차 누적 접종자 845만명
- 지방 소멸이라구요?…충북 진천 82개월째 ‘인구 역주행’
- 연간 2만명 ‘성범죄 재앙’…미군 지휘관 기소권 뺏는다
- 이 남자 때문에 바이든 속이 터진다
- “그곳에선 아프지 마세요”…축구계 유상철 감독 애도 물결
- ‘페미니즘 세뇌’시키는 교사조직?…‘불온사상’ 돼가는 성교육
- “지구 최대 탄소 저장고, 바다의 그린벨트 1.2→30%로”
- [단독] 네이버 ‘고용창출 우수기업’ 이유로 5년간 근로감독 ‘0’
- 고교실습생 현장안전 ‘먼길’…“민호가 남긴 숙제 꼭 풀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