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뼈 부러져도 헤딩, 붕대 투혼까지..하늘의 별이 된 '투지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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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의 영웅, 투지의 아이콘 유상철이 하늘의 별이 됐다.
유상철 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7일 오후 7시 20분경 췌장암 투병 끝 유명을 달리했다.
유상철은 한국축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만능 멀티플레이어로 기억된다.
요코하마 팬들은 그의 투병 소식이 전해지자, '할 수 있다 유상철형!!'이라는 걸개를 만들어 매 경기 그를 응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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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서재원 기자] 한국축구의 영웅, 투지의 아이콘 유상철이 하늘의 별이 됐다.
유상철 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7일 오후 7시 20분경 췌장암 투병 끝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50세. 스포티비뉴스는 유 감독의 측근을 통해 그의 별세 소식을 확인했다. 그는 2019년 10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뒤 3년째 투병 중이었다.
유상철은 강했다. 췌장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벤치를 지키며, “인천을 잔류시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2020시즌을 앞두고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지휘봉을 내려놓았지만, 치료 중에도 인천을 방문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라운드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든 항암치료를 버텨냈다. 하지만, 최근 급격히 병세가 악화됐다. 입원 치료를 통해 마지막 사투를 펼쳤지만, 7일 일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끝내 눈을 감았다.
유상철은 한국축구의 영웅이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핵심이자, 주역이다. 특히, 2002년 6월 4일 폴란드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시원한 중거리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며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을 이끌었다.
그는 2002 한일월드컵뿐 아니라, 한국축구 황금기의 중심에 있었다. 건국대 재학 시절인 1994년 미국과 A매치에서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된 후 독일월드컵 예선 우즈베키스탄전(2005년)까지, 124경기 18득점을 기록했다. 월드컵 통산 득점은 1998 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 득점 포함 2골이다.
유상철은 투지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는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에서 코뼈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헤더 골을 넣었다. 코칭스태프가 출전을 만류했음에도 직전 경기 참패(프랑스전 0-5 패)를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고 뛰었다. 2004년 한일전에선 붕대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유상철은 한국축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만능 멀티플레이어로 기억된다. 한일월드컵에선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프로에선 최전방 공격수부터 최후방 수비수까지 전 포지션을 소화했다. K리그에선 공격, 미드필더, 수비 부문에서 모두 베스트11을 수상한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일본도 그를 사랑했다. 유상철은 요코하마F.마리노스(1999~2000, 2003~2004), 가시와 레이솔(2001-2000)에서 활약하며, 2003년과 2004년 요코하마의 J리그 2연패를 이끌었다. 요코하마 팬들은 그의 투병 소식이 전해지자, ‘할 수 있다 유상철형!!’이라는 걸개를 만들어 매 경기 그를 응원하기도 했다.
한국축구의 영웅이자, 인천의 감독으로서 사랑받았던 유상철. 일본 축구팬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던 그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비록, 2021년 6월 7일 하늘의 별이 됐지만, 그의 헌신과 투혼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스포티비뉴스=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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