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은 국민들에게 '투혼'과 '희생' 그 자체였다

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2021. 6. 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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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인천 유나이티드 명예 감독이 췌장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유상철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투혼'과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그 속에 '주장 완장'을 찬 유상철의 투혼은 돋보였다.

유상철의 골 덕분에 한국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유일한 승점을 따냈고 유상철과 대표팀의 투혼에 감동한 국민들은 월드컵 실패에도 'K리그 르네상스'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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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유상철 인천 유나이티드 명예 감독이 췌장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50세.

유상철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투혼'과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 골 이후 세리머니를 하는 유상철. ⓒAFPBBNews = News1

유상철은 7일 오후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다.

'유상철'이라는 이름이 국민들에게 처음 각인된 것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었다. 당시 유상철은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8강 한일전에서 0-1로 뒤지던 상황에서 짜릿한 동점골을 선사했다. 한일전 역대 명승부에 들어가는 이 경기는 황선홍의 골로도 기억되지만 유상철의 득점이 없었다면 기적적인 역전승이 불가능했다.

이후 유상철은 울산 현대에서 김병지, 김현석 등과 전성기를 이끌며 K리그와 아디다스컵 등을 우승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안긴 유상철이다. 멕시코에게 1-3 역전패, 거스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에게 0-5 대패를 당하며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참사가 일어난 상황. 이미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상황에서 벨기에전에 나선 한국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온몸 바쳐 뛰었다. 그 속에 ‘주장 완장’을 찬 유상철의 투혼은 돋보였다.

왼쪽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몸을 날려 넘어지며 슈팅해 1-1 동점골을 넣었다. 유상철의 골 덕분에 한국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유일한 승점을 따냈고 유상철과 대표팀의 투혼에 감동한 국민들은 월드컵 실패에도 ‘K리그 르네상스’로 화답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유상철. ⓒAFPBBNews = News1

유상철은 1999년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 무대로 적을 옮겼다. 일본에서도 J리그 우승 2회 등을 경험하며 일본에서도 영원히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다.

2001년 부임한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을 보고 깜짝 놀란다. 코뼈가 부러졌는데도 계속 뛰겠다고 고집했고 부러진 코뼈를 안고 헤딩골까지 넣은 것. 이 모습을 보고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에 대해 크게 감명받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만 31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맞은 2002 한일 월드컵. 유상철은 황선홍이 골을 넣으며 1-0으로 앞서던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서 후반 초반 벼락 같은 중거리슈팅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는 득점까지 해낸다. 유상철의 세리머니는 한국의 월드컵 첫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었기에 국민들에게 더 짜릿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유상철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로 알려져있지만 K리그 득점왕까지 차지했었고 중앙 수비는 물론 풀백, 윙으로도 뛰었다. 팀동료였던 김병지는 스포츠한국과 선정한 ‘함께 뛰어본 선수 베스트11’에 오른쪽 풀백에 유상철을 선정했을 정도였다.

모든 포지션에서 뛴다는 것은 그만큼 동료들을 위해,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은 원치 않아도 팀을 위해 뛰는 모습은 감독 생활 때도 잘 드러났다. 감독으로 자세를 낮추고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유상철 감독의 추종자 선수들이 많았다.

ⓒ프로축구연맹

심지어 2019년 11월 췌장암 판정을 받고도 인천 유나이티드의 K리그1 잔류를 위해 감독직을 놓지 않았다. 자신이 갑자기 나가면 팀이 망가질 것을 우려했고 끝내 인천에 극적인 잔류를 남기고 투병을 위해 감독직을 내려놨다. 그의 희생정신은 K리그에 큰 감동을 줬다.

항상 유상철은 경기장 위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투혼을 보여줬다. 그리고 팀과 동료를 위해 희생하는 선수이자 감독이었다.

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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