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대신 양성평등"..여전히 용어 하나에 발묶인 지방자치
[경향신문]
서울 관악구는 지난 4월1일 ‘성별영향분석평가 조례 일부개정안’ 입법예고를 실시했다. 2015년 12월 제정 당시부터 쓴 용어인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바꾸려고 했다. 개정 취지는 상위법인 ‘성별영향평가법’ 표기를 따르자는 것이다. 이 법은 2012년 제정 당시부터 줄곧 성평등이란 용어를 썼다.
하지만 관악구는 지난달 말 이 개정안의 구의회 상정을 유보했다. 입법예고 기간 20일 동안 반대 의견이 e메일·팩스로 19건, 법제시스템 댓글로 717건 제기됐다는 게 이유였다. 반대 의견의 주요 내용은 “‘성평등’은 남성·여성 외 동성애 등을 인정해 가족 중심의 사회 구조를 해체하고, 도덕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수 개신교계가 조직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관악구는 반대 의견을 반영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단순 용어정비를 위해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개정을 추진할 실익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개신교계를 중심으로 ‘반동성애’를 내세우는 세력의 집단 행동이 조례 용어를 바꾸는 행정마저 막아세운 게 비단 관악구만의 일은 아니다.
7일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경북 구미시는 성별영향평가 관련 조례를 아직 입안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해 9월17일 구미시가 성별영향평가 조례안을 시의회에 상정했지만 무기명 표결을 거친 끝에 보류했다. 당시 김낙관 시의원(국민의힘)은 토론하면서 성평등 용어를 두고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성 정체성 사이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했다.
구미시는 지난 1월20일엔 ‘성별영향평가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 입법예고를 공고했다. 성평등·양성평등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고, 성별영향평가 실시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만 규정한 안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치법규정보시스템을 통해서만 반대 의견이 600개 이상 접수됐다. 이후 이 조례안은 시의회에 상정되지 않았으며, 시의회가 관련 논의를 한 공식적인 기록도 없다.
최근엔 일정한 수의 주민들이 조례안을 만들어 청구하면 자치단체장이 의회에 제출해야 하는 ‘주민조례청구제도’가 이용되기도 한다. 제주도의회엔 지난 5월17일 주민 6182명이 서명한 ‘양성평등 기본 조례 개정안’이, 경기도의회엔 지난해 10월23일 14만4161명이 서명한 ‘성평등 기본조례 개정안’이 각각 회부됐다. 모두 성평등 용어를 양성평등으로 바꾸자는 안이다.
여러 자치단체가 같은 문제를 겪었지만, 아직 이들의 요구가 관철된 경우가 많지는 않다. 자치법규정보시스템을 보면, 전국 광역자치단체 17개, 기초자치단체 226개 중 성별영향평가 관련 조례를 보유한 222곳 대부분은 상위법을 따라 성평등이란 용어를 택했다. 단 12곳만이 조례의 제정 목적·정의 등 주요 조항에서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서울에서는 25개 자치구 중 16개 자치구에 관련 조례가 있고, 서초·송파·관악구만 양성평등을 사용한다. 경북에서는 23개 기초자치단체 중 구미시를 제외한 22개 단체에 관련 조례가 있고, 이 중 경주시만 양성평등을 쓴다.
다만 관악구나 구미시처럼 뒷걸음치는 사례가 자꾸 등장하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특정 집단이 지역 주민을 가장한 ‘과장된 위세’에 휘둘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무엇보다 성평등 용어 사용은 상위법을 준용하는 것이어서 근거가 뚜렷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기중 관악구의원(정의당)은 기자와 통화하면서 “이번 일이 댓글 수백개로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을 막을 수 있다는 뜻으로 비쳐선 안된다”며 “다음 회기에 관악구 대신 같은 조례안을 발의해 의결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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