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이제부터 파국의 시간..연극 '완벽한 타인' [리뷰]
[경향신문]
매일 부대끼며 사는 부부나 연인, 부모와 자식, 둘도 없는 오랜 친구. 우리는 친밀한 관계의 타인에 대해 어디까지 알까.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어도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임을 깨닫게 된다.
지난달 18일 막을 올린 연극 <완벽한 타인>은 서로에게 비밀이 없다고 믿는 7명의 오랜 친구와 커플이 그 상자를 열었다가 벌어지는 하룻밤의 파국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현대사회에서 그 상자는, 단연 “우리 삶의 블랙박스”라 할 수 있는 휴대전화다.
“그럼, 우리 게임 한 번 해볼까?” 어른들의 불장난 같은 게임이 어떤 대참사를 가져올지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게임의 룰 때문이다. 룰은 하나다. 저녁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모두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도착하는 모든 메시지와 통화를 공유하는 것. 공연 초반, 무대 위 길게 뻗은 일자형 식탁을 두고 툭 던지듯 나온 대사는 이후 극의 전개를 암시한다. “뭐야 이거, 최후의 만찬이야?”
연극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이 있는 날, 의사 부부인 에바와 로코가 절친한 친구 부부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에바의 제안으로 게임이 시작되고, 화기애애했던 저녁 식사는 점차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달의 어두운 면이 잠시 드러났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되돌아오는 월식처럼, 각자가 숨겨왔던 크고 작은 비밀이 모습을 드러낸다.
스토리가 익숙한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기 때문이다. 파올로 제노베제 감독의 원작 영화(2016)는 개봉 3년 만에 전 세계 18개국에서 리메이크돼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영화’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국내에서도 2018년 같은 제목의 리메이크 영화가 개봉돼 500만명 넘는 관객을 모으는 등 흥행했다.
원작 자체가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실내 소동극인 만큼, 연극도 무리없이 이를 무대 위에 구현했다. 무대 중앙, ‘최후의 만찬’ 장소처럼 일렬로 배치돼 관객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식탁은 모든 배우들의 표정과 연기를 보여주기에 맞춤한 설정이다. 무대 뒤편에 배치된 대형 스크린은 극의 방향키인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며 영화의 클로즈업을 대신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스크린과 다른 연극의 매력은 당연하게도 현장성에 있다. 7명의 배우들은 110분 동안 마치 탁구공 넘기듯 쉴 새 없이 대사를 주고받는데, 이들의 밀고 당기는 대화만으로도 늘어짐 없이 작품을 끌고 간다. 이미 영화를 통해 줄거리를 알고 있는 관객들이라도 묘한 스릴을 자아내는 배우들의 밀도 높은 심리전에 몰입하게 된다. 다만 원작을 충실히 구현한 탓인지, 영화와는 다른 연극만의 질감이나 표현방식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아쉽다.
연극 <생쥐와 인간> <뜨거운 여름>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 등의 작품을 선보여온 민준호가 연출했다. 유연, 장희진, 양경원, 박은석, 유지연, 정연, 김재범, 박정복, 박소진, 임세미, 이시언, 성두섭, 김설진, 임철수, 김채윤 등 15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공연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8월1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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