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판 단군신화' 속 페르시아 왕자·신라 공주의 '사랑'과 '전쟁'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입력 2021. 6. 7. 06:00 수정 2021. 6. 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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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벌써 13년이 훌쩍 흘렀네요. 2008년 초에 이란을 답사하고 있었는데 테헤란에서 이주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란 젊은이들이 답사단 멤버인 한국 여성들을 보고 ‘양곰이 양곰이’하고 몰려들었던 겁니다. ‘양곰이가 누구야’ 했더니 글쎄,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Janggumi)’의 이란식 발음이었습니다.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이란의 서사시인 <쿠쉬나메>. 이란학자의 번역결과 서사시에는 ‘Bashilla(바실라·더 좋은 신라)’, 즉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 800여쪽 중 500여쪽에 달했다.


■이란과 한국의 공통적인 역사

2006~2007년 사이 이란 국영 채널 2에서 방영된 ‘대장금’이 평균 시청률 85~90%에 달할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는데요. ‘대장금’ 외에도 ‘주몽’과 ‘동이’도 6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할만큼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는데요. 왜 그렇게 한국의 사극이 이란에서 인기냐고 물었더니 그러더라구요.

한국 사극의 서술이 이란 역사와 비슷하다는 겁니다. 인류이동 및 동서문명의 교차로인 이란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세력과 충돌을 빚었는데요. 지금도 15개국과 국경 및 바다를 접하고 있구요. 또한 이슬람 내에서도 다수파인 수니파의 협공 속에 시아파의 전통을 이어가느라 고난의 역사를 걸었다는군요.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꿈을 이루는 ‘대장금’과 ‘주몽’, ‘동이’의 주인공들이 파란만장한 이란인들의 역사와 맞아 떨어진다는 겁니다. 또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의상이 헤자브 등을 쓰고 몸 전체를 가리는 이란 여성과 닮았다는 점도 친근감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2006~2007년 사이 이란 국영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시청률 85~90%에 이를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쿠쉬나메> 발견의 충격

몇년 후 아주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1998년 이란 학자(잘랄 마티니)가 11세기 이전 300~400년간 전해 내려오던 이란의 서사시인 <쿠쉬나메>를 번역했는데, 그 속에서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 엄청난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은 이란 국립박물관의 동아시아 담당 큐레이터이자 아자드대 교수(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가 중동 전문가인 당시 이희수 한양대교수(성공회대 석좌교수)에게 연락을 해온 건데요.

이란은 인류이동 및 동서문명의 교차로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지금도 15개국과 국경 및 바다를 접하고 있다. 또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의상이 헤자브 등을 쓰고 몸을 가리는 이란 여성과 닮았다는 점도 이란인들에게 어필한다는 분석이 있다.


곧바로 이란으로 건너가 자료를 확인한 이희수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답니다. ‘페르시아와 신라가 혈맹관계’ 였음을 알리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인데요. 요약하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226~651)의 왕자가 신라 공주와 혼인해서 왕자를 생산하고, 그 왕자가 귀국해서 아랍의 폭정자(자하크)를 물리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 800여 쪽 가운데 신라 관련 부분만 500여쪽에 이를 정도였답니다.

역사기록으로 살펴볼까요. 사산조 페르시아는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한 뒤 모술·니하반도·하마드한·라이·이스파한 등 주요도시들을 잇달아 잃으면서 멸망하는데요.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재위 632~651)의 왕자 페로즈(피루즈·?~708)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이란인 잔존세력을 이끌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페르시아-신라 연합군의 공동작전

대서사시인 <쿠쉬나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로 이 무렵(7세기 중반), 마지막 왕자 페로즈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사망한 시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으로 망명한 마지막 왕자 페로즈는 ‘쿠쉬나메’에서 아비틴(Abtin)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요. 그런데 중국에서 이란 공동체를 이끌던 아비틴은 중국내 정치 격변기를 맞아 제3국으로 재망명을 결심합니다. 이 때 주변국인 마친(Machin)의 국왕이 “지상 낙원인 신라는 침략이 불가능한 안전한 나라”라고 치켜세우며 추천했는데요. 과연 신라왕(테후르)은 망명객인 아비틴 일행을 환대합니다. 서사시는 ‘바실라(Bashilla·더 좋은 신라, 아름다운 신라라는 뜻)’를 “달처럼 아름다운 인형 같은 선녀들이 가득찬 향기로운 낙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7세기초 조성된 경북 칠곡의 송림사 전탑에서 나온 사리기 유리잔(왼쪽).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유행한 고리무늬가 장식됐다. 오른쪽 사진은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커트 글라스(Cut Glass·무늬를 새긴 유리). 아비틴의 고향인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의 유리잔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이한상 교수 제공


“낙원처럼 꾸며진 궁 내부는 진정으로 군주의 처소 같았다. 궁 전체가 하늘색 배경에 금으로 장식돼 있었고, 모든 의자에 사파이어와 루비가 세공돼 있었다. 궁녀들은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신라왕 테후르는 “우리 역사는 천년 이상이고, 아무도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더할 수 없는 환대를 받은 아비틴은 신라 국왕과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를 즐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 황제가 신라왕을 협박하는 편지를 보낸 뒤 신라를 침공합니다. 이에 굳건한 동맹을 이룬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은 중국 침공군을 물리칩니다. 이어 중국이 아비틴의 신라 망명을 주선한 마친왕을 핍박하자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은 중국 원정길에 오르는데요. 이때 아비틴이 연합군을 지휘했는데요.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비틴은 신라왕의 딸(프라랑)과 혼인합니다. 아비틴 부부는 곧 임신하는데요. 그런데 아비틴의 꿈에 “장차 태어날 왕자가 바그다드의 자하크(아랍의 폭정자)를 물리치고 이란인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는 계시가 나타납니다.

경주에서 출토된 ‘입수쌍조문’ 석조. 나무를 사이에 두고 새 두 마리가 서있는 모티브 역시 사산조 페르시아 건축물 등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결국 아비틴은 부인과 함께 이란으로 떠났는데요. 그러나 아비틴은 자하크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부부 사이에 태어난 페르시아-신라 혼혈왕자인 페리둔은 훗날 페르시아의 적인 자하크를 물리치고 이란의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이란의 신라공주(프라랑)는 신라의 아버지(테후르)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아버지, 제 아들 페리둔이 자하크의 군대를 모두 죽였습니다.”

손자의 승전 소식에 신라왕은 성대한 연회를 열고요. 피를 나눈 사이가 된 신라-페르시아 양국은 이후 교류와 협력관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이란의 서사시 <쿠쉬나메>의 내용입니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봉수형 유리병과 이란 국립박물관 소장 유리병.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흡사하다. | 이희수 교수 제공


■경주에서 확인된 이란의 여신 ‘아나히타’

어떻습니까. 그저 신화일 뿐 역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말하겠죠. 그러나 ‘쿠쉬나메’는 그리스 로마신화나 단군신화가 그렇듯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신라-페르시아 관계를 알려줄 비밀코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죠. 곱씹어 보면 <쿠쉬나메> 이전부터 신라-이란간 국제교류가 활발했다는 단서는 많습니다. 5~6세기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제품을 봅시다. 특히 페르시아 지방의 기법으로 제작된 ‘커트 글라스(Cut Glass·무늬를 새긴 유리)’는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됐습니다. 커트 글라스는 ‘쿠쉬나메’의 주인공인 아비틴의 본향, 즉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입니다. 또 7세기 초 조성된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그릇도 페르시아계입니다. 유리잔 표면에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유행했던 고리무늬가 장식돼있습니다.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페르시아산 뿔잔(왼쪽 사진)과 부산에서 출토된 신라산 말머리장식 도기 뿔잔. 역시 흡사한 제품이다. | 이희수 교수 제공


황남대총 북분에서 확인된 5~6세기 은제잔은 어떻습니까. 여인 한 사람이 조각돼 있는데요. 이 여인은 이란의 아나히타(Anahita) 여신상과 흡사합니다. 아나히타는 풍요와 전쟁, 농경을 관장하는 여신입니다.

지금도 이란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축조된 아나히타 신전이 산재해 있을 정도로 고대 신상의 중심인물이라는데요. 국가의 정신적인 통합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신이 그릇이나 도구에 조각돼 있다면 그것은 일반교역품으로 보기는 어렵고요. 최고위층의 신앙의례나 국가적인 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신라 왕실과 사산조 페르시아 왕실 사이에 고도의 교류행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 왕족의 후예인 아비틴이 신라왕(테후르)의 딸인 신라 공주(프라랑)과 혼인했다고 했습니다.

원성왕릉을 호위한 무사상.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고 뒷부분을 보면 터번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 이희수 교수 제공


■흥덕왕의 수입 금지품목에 오른 페르시아 제품

834년 신라 흥덕왕은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즐기며 해외명품만 선호한다”고 한탄하면서 몇몇 해외명품을 국법으로 금했는데요.(<삼국사기> ‘잡지’)

이 해외명품 목록에 이란산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한 ‘슬슬전(瑟瑟鈿)’과, 양모를 주성분으로 섞어짠 페르시아(波斯)산 직물인 구수와 탑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라백성들이 ‘페르시아 카펫(구수와 탑등)’을 깐 걸상까지 수입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또 경주 구정동 방형 무덤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을 보면요.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이 서역인상은 왼쪽 옷깃만을 바깥으로 접은 절금을 착용하고 가죽장화를 신었습니다. 또 두 손을 보면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용 스틱 같은 것을 잡고 있어요.

경주 구정동 고분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왼쪽 사진).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경기용 스틱을 쥐고 있다. <쿠쉬나메>에 아비틴과 신라 왕이 폴로경기를 벌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오른쪽).


어떻습니까.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인과 신라 왕·귀족간 폴로경기를 벌였다고 했습니다. 폴로(격구)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래됐고,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한 유목민족의 스포츠거든요.

또 <쿠쉬나메>를 보면 신라왕이 왕자 2명을 항구로 보내 아비틴 일행을 영접합니다. 그리곤 서울로 모신 뒤 갖가지 연회를 베풀며 환대하고, 마침내 공주와 아비틴의 혼인을 허락합니다. 이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가락국에 도착하고, 김수로왕이 허황옥을 극진히 접대한 뒤 혼인해서 왕자(거등왕)를 낳는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가장 먼저 신라를 언급한 이븐 쿠르다드비의 <도로와 왕국총람>은 “신라에는 금이 많고 그곳에 가는 무슬림은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출처:KBS ‘파노라마-쿠쉬나메편’)


■“신라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

또 <쿠쉬나메>에서 신라왕과 망명한 아비틴이 ‘황금왕좌’에 앉아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은 어떨까요. 과장일까요. 그러나 별로 놀랄 일이 아니죠. ‘신라=황금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전성기에 35채(실제는 39채)의 금입택(金入宅)이 있다”(<삼국유사> ‘진한조’)는 내용도 있습니다. 중세 아랍지리학의 거장인 알 이드리시(1100~1165)는 “신라의 금은 너무도 흔해서 심지어 개 목걸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황금으로 만들었다”(<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1154)고 했습니다.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크디시(946?~1000?)는 966년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식사 때는 금으로 된 그릇을 사용한다”(<창세와 역사서>)고 했습니다.

문헌기록 뿐 아니라 6세기 신라 적석총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온갖 황금유물들은 이같은 아랍인들의 언급이 거짓이 아님을 웅변해주고 있죠.

<쿠쉬나메>를 보면 중국의 변방국왕인 마친은 아비틴에게 신라를 망명지로 추천하면서 ‘신라=낙원의 나라’로 했다지요. 9세기에 필사된 이븐 쿠르다드비(820~912)의 <도로와 왕국총람>은 “신라에는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가는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 버린다”고 했어요.

또 지리학자 알 카즈위니(1203~1280)는 “‘알라의 은혜’ 덕분에 질병에 걸린 사람이 신라에 가면 곧 완치되고, 신라로 들어간 사람들은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여러 나라의 유적과 인류소식>)고 했습니다. 카즈위니는 심지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니 ‘쿠쉬나메’의 아비틴이 당연히 정착하고 싶어했겠죠.

흥덕왕이 수입 사용을 금지시킨 해외명품 목록에는 페르시아산 머리장신구(슬슬전)과 구수와 탑등 같은 페르시아산 직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수와 탑등은 페르시아산 카펫일 것이다.


■혈맹일지 모르는 이란

또 <쿠쉬나메>에는 중국왕은 신라왕을 협박하는 편지를 보낸 뒤 신라를 공격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볼까요. 671년(문무왕 11) 신라가 가림성을 공격해서 당나라군 5300명의 목을 베었는데요. 그러자 당나라 총관 설인귀(613~683)가 문무왕(661~681)에게 협박편지를 보냅니다.

“신라왕이 전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구나. 말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해 제사가 끊어질 것이니 조심하라.”

실제로 당나라는 675년(문무왕 15년) 20만 대군을 동원,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맞섰는데요. 그러나 신라의 반격을 받아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겨나죠. <쿠쉬나메>에서 중국군이 신라를 공격했지만 완패당한 뒤 중국으로 쫓겨간 상황과 흡사합니다.

물론 <쿠쉬나메> 속 이야기가 실제 역사냐 하고 따져 묻는다면 할 말이 없어요. 페르시아 왕족이 신라공주와 혼인했고, 그 후손이 이란의 영웅이 됐다는 이야기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태도변화에 따라 한국-이란 관계가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데요. 그러나 적어도 남의 장단에 맞춰 이란을 ‘불량국가’ 취급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압니까. <쿠쉬나메>에서 보듯이 한국과 이란이 1400년 된 혈맹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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