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라 욕해도 맘껏 부려썼다, 망령 씐 '식민지의 국어'

한겨레 2021. 6. 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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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33살 프로젝트 : 김수영][거대한 100년, 김수영] ③일본/일본어
25살까지 썼던 일본어
되레 낯설었던 우리말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일본 괄호'에 갇혀 고투
'피식민 피해의식' 망령과
그것을 뛰어넘는 글쓰기
결국 그는 모국어로
'거대한 뿌리'를 써냈다
김수영의 1960년대 노트에 씌어 있는 일본어 산문. 김현경 제공. 김응교 사진

아직도 섬나라 말을 유명인이 주저리 남발하면 당장 시끄러워진다. 해방되자마자 한국에서 일본어는 금지어였다. 교사가 칠판에 일본어를 쓰면 당장 친일파로 몰리는 판이었다.

와사, 에리, 오야붕, 조로, 유부우동, 쓰메에리, 곳쿄노마치, 노리다케, 인치키, 나츠가레, 마후라, 와이로 등.

놀랍게도 김수영은 이런 일본어를 맘껏 부려 썼다. 실력 있는 일본 작가 이름을 숨기지 않고 글에 등장시켰다. 김현경 여사가 보관하고 있는 김수영 유품 중에는 일본어로만 쓰인 노트가 여러 권 있다.

‘일본’은 1921년에 태어난 김수영에게는 피할 수 없는 괄호였다. 김수영, 김종삼, 이병주, 장용학 같은 1921년생은 해방이 되던 해 스물다섯 살까지 식민지 국어(일본어)를 써야 했다. 김수영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일본 괄호’에 갇혀 고투했다.

1941년 12월,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22세의 김수영은 선배였던 이종구와 함께 도쿄 나카노에 하숙한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려고 조후쿠(城北) 고등예비학교에 들어갔지만, 대학이 아니라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의 연극연구소에 들어간다. 거기서 연출 수업을 받았다지만,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미즈시나 하루키는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포도가 그려 있는 극단 마크처럼 자유를 지향하면서 진보적 반체제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던 쓰키지(築地) 소극장의 멤버였다. 김수영의 다른 하숙집은 현재 와세다대학 21호관 건너편 언덕에 있었다. 거기서 걸어서 5분 안에 근대연극박물관이 있다. 미즈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서 배우고, 와세다대학 근처에서 지냈던 김수영은 이후 시에 연극적 기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스가이 유키오가 쓴 <쓰키지소극장> 표지에는 소극장의 마크인 포도가 그려져 있다. 김응교 제공

해방 후 1947년에 발표한 ‘가까이 할 수 없는 책’에는 캘리포니아를 “가리포루니아”(カリフォルニア)라고 쓴 구절이 나온다. 김수영은 캐시밀론을 “카시미롱”이라 썼다. 그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일본어 표현이 고착되어 있다는 증표다. 그는 일본어 사용자가 겪은 상처를 그대로 남기려 했다. 아쉽게도 2018년도 <김수영 전집>에서 ‘가리포루니아’를 표준어 ‘캘리포니아’로 고쳐 냈는데, ‘그대로’라는 메모도 있으니 원래대로 두면 한다. 김수영은 “나는 학교교육에서 정확한 우리말을 익힐 기회가 별로 없었다”며 이렇게 털어놓았다.

“기자생활을 시작하던 그 당시로서는 나는 일본어와 영어가 우리말(글)보다 수월했다.”(‘히프레스 문학론’, 1964)

그의 세대에게는 일본어가 익숙했고, 해방 후 우리말은 되레 낯설었다.

냉전과 함께 본 일본

김수영은 일본을 분단 문제와 함께 보기도 했다. ‘나가타 겐지로’(1960)는 오페라 가수였던 테너 재일한국인 김영길을 가리킨다.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그는 1928년 평양 제2중학교를 졸업,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동경일일신문음악콩쿠르 성악부문에서 3년 연속 입상했다. 1935년부터 일본 킹레코드 가수로 <소년 전차병의 노래>, <천황의 백성인 우리들>, <가미카제 노래> 등 음반을 냈다. 1941년에는 지원병을 장려하는 국책영화 <그대와 나>의 주연을 맡았던 그는 놀랍게도 1960년 북송선을 탔다. 김수영은 나가타의 북송 소식을 듣고 시를 쓴다.

나가타 겐지로 음반 사진. 김응교 제공

어이가 없어 “씹었던 불고기를 문 채 가만히 있”는다. “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며 어처구니 없는 운명에 처하는 상황을 자조한다.

일본 군국주의에 충성을 했던 자가 북한의 인민사회 건설을 위해 북송선을 타는 운명은 너무도 괴이쩍다. 김수영에게 ‘일본’은 분단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해 12월25일에 김수영은 “‘나가타 겐지로’와 ‘〇〇〇〇〇’(김일성 만세-인용자)를 함께 월간지에 발표할 작정이다”라고 썼다. 왜 두 가지를 함께 발표하려 했을까. 두 가지 모두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일본이라는 억압, 후자는 냉전이라는 억압, 두 억압을 모두 직시하려 했던 것이다. 분단과 냉전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그 문제를 김수영은 일본에서 간행된 <한양> 등을 참조하며 성찰했다.

1965년 체제와 히프레스 문학론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가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협상을 하면서 한일기본조약은 협의된다. 1964년 1월부터 한일협상에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고, 소위 ‘6.3사태’라고 하는 대규모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박두진, 조지훈, 안수길, 박경리, 김수영, 신동엽 등이 반대성명에 서명한다. 박수연 교수가 ‘65년 체제와 김수영 시의 세 층위’에 쓴 대로, 65년 한일국교정상화 체제로 가는 과정에서, 그가 역사를 보는 시각은 넓어진다.

김수영은 ‘히프레스 문학론’에서 한국의 작가를 35세를 경계로 나눈다. 첫 번째 부류는 아직 일본어에 갇혀 있는 35세가 넘은 작가들로, 이들은 일본의 ‘총독부 문학’에 갇혀 있다고 한다. 아직도 일본 잡지에 함몰되어 있다며 “우리나라 소설의 최대의 적은 <군조> <분가카이> <쇼세스 신초>다”라며 한탄한다.

두 번째 부류인 35세 미만의 작가들은 미국문학에 함몰되어 있다. 이들은 “미국대사관의 문화과를 통해서 나오는 헨리 제임스나 헤밍웨이의 소설”이나 “반공물이나 미국 대통령의 전기”나 보면서 소위 ‘국무성문학’의 틀에 갇혀 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일본 ‘총독부 문학’과 미국 ‘국무성 문학’에 갇혀 있는 한국 작가의 시각을 ‘히프레스’(hipless) 곧 수치를 모르고 엉덩이를 드러낸 문학판이라고 풍자한다.

서울역 인근 염천교의 옛 모습. 김수영의 시 ‘현대식 교량’(1964)은 염천교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으로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수영 시 ‘현대식 교량’ 원고 첫 장. 출처 <김수영 육필 시고 전집>(이영준 엮음, 민음사).

식민지라는 단어는 그의 산문에는 여러 번 나오는데, 시에는 ‘현대식 교량’(1964)에 한 번만 나온다.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고 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해방되었지만 한국인은 여전히 “식민지의 곤충”으로 살아야 했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가 달리는 다리,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던 다리는 1925년 경성역이 건립되면서 만들어진 ‘싸롱화(살롱화)’라고 하는 수제화 구두 가게가 늘어선 ‘염천교 다리’일 것이다.

젊은 역사와 늙은 역사가 엇갈리는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고 썼다. 김수영은 늙은 세대의 일본적인 것에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엇갈리며 극복하려 했다. 그 현장에서 사랑을 깨달으면서 본 적(敵)은 일본적인 것이었을까. 자기 내면에 똬리 튼 망령이었을까.

망령을 뛰어넘는 글쓰기

김수영은 “한국말이 서투른 탓도 있고 신경질이 심해서 원고 한 장을 쓰려면 한글 사전을 최소한 두서너 번은 들추어”(‘시작 노트 4’) 본다며, 능숙한 일본어와 서투른 한국말을 대비시킨다. 모국어와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면서 쓸 수밖에 없는 삶은 “몇 차례의 언어의 이민을 한” 그의 운명이었다. “일기의 원문은 일본어로 씌어져 있다”(‘중용에 대하여’)며 일본어로 쓴 일기를 숨기지 않았다. “사전을 보며 쓰는 나이와 시(詩)/ 사전이 시 같은 나이의 시/ 사전이 앞을 가는 변화의 시”(‘시’)라는 구절처럼 그는 익숙한 일본어로 쓰고 사전을 찾아 낯선 한국어로 번역했다. 늘 사전을 뒤적이며 시를 써야 했던 그에게 “사전이 시”였다.

“그대는 기껏 내가 일본어로 쓰는 것을 비방할 것이다. 친일파라고, 저널리즘의 적이라고 (중략) 이리하여 배일(排日)은 완벽이다. 군소리는 집어치우자. 내가 일본어를 쓰는 것은 그러한 교훈적 명분도 있기는 하다. (중략) 나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망령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시작 노트 6’)

일본어는 식민지 시절에 그에게 씌워진 억압이었고, 한국어는 해방 후 그에게 씌워진 덮개였다. 그에게 망령은 일본어로 쓰면 죄를 짓는 양 괴로워하는 피식민의 피해의식이 아닐까. 그 망령을 극복하려고 그는 까짓것 일본어로 글을 쓴다. 더 이상 고민 안 하고 해방 후 20년 만에 일본어로 쓴다.

김수영의 1960년대 노트에 씌어 있는 일본어 산문. 김현경 제공. 김응교 사진

일본어를 쓰면서도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는 민족과 민중이란 단어가 나온다.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 버릴 것인가.”(‘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1958)”라고 민족을 쓰거나, 군사정권이 강요하는 국민가요 운동에 맞서 민요의 중요성을 거론하고, 아일랜드 민족시인 예이츠를 소개하기도 한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며,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거대한 뿌리’, 1964)며 ‘거대한 뿌리’의 구체적 실증을 호명한다.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눈’, 1961)라며 그는 시에 동네 청년, 할아버지, 머슴, 아들 등 실제 이름을 넣었다. 다중(多衆)을 떠올리게 하는 물방울, 파, 풀 같은 ‘무수한 반동’을 시에 등장시켰다. 함석헌 씨의 글이라도 한번 읽어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 없거든 “죽어버려라!”(‘아직도 안심하긴 빠르다’)고 일갈했다.

일본어로 글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민족과 민중의식이 없다는 해석은 왜곡이다. 다만 그가 위태롭게 본 것은 세계가 아니라 우물 속 개구리 같은 민족과 민중 개념이었다(‘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반대로 ‘일본어 창작=반민족’이라는 고정관념 또한 좁은 시각이다. 식민지 시대 때도 일본어로 제국을 겨냥했던 김사량이 있었고, 지금도 일본어로 부조리한 역사를 기록하는 디아스포라 작가 김시종, 김석범, 양석일 등이 있다.

임화의 ‘현해탄’과 다른 격랑에 마주친 김수영은 일본적인 것과 냉전적인 것을 함께 극복해야 했다. 지리멸렬의 시대에 유대인 카프카가 써야 했던 독일어처럼, 김수영에게 일본어는 소수자 언어가 아닐까. ‘친일문학=일본어 사용/민족문학=한국어 사용’이라는 낡은 이항대립은 그의 글쓰기 앞에서 박살난다. 양극단 사이에서 아픈 몸으로 걸으며, 이국어를 통해 세계지성을 습득하고, 결국 그는 모국어로 거대한 뿌리를, 아프지 않을 때까지, 온몸으로 썼다.

김응교

김응교 시인, 숙명여대 교수

현대식 교량
                                                                   김수영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항에 있지 않다
저 젊은이들의 나에 대한 사랑에 있다
아니 신용이라고 해도 된다
“선생님 이야기는 20년 전 이야기이지요”
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나이를 찬찬히
소급해 가면서 새로운 여유를 느낀다
새로운 역사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경이는 나를 늙게 하는 동시에 젊게 한다
아니 늙게 하지도 젊게 하지도 않는다
이 다리 밑에서 엇갈리는 기차처럼
늙음과 젊음의 분간이 서지 않는다
다리는 이러한 정지의 증인이다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그러한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實證)을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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