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눈물' 짜내는 고통을 아는가
목판에 30∼40번 옻 칠하고 말리길 거듭
산호·호박·진주·자개 등 붙여 풍경 완성
한지 밀고 때려 변형한 '조형적 실험'도
시간 갈수록 색 맑아지고 밝아지는 옻칠
"언젠가 환하게 '피어날'..삶 치유 봤다"
맞다. 창작의 괴로움을 말하는 거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 뒷짐 진 채 듣고만 있을 작가가 어디 있겠나. 연차 불문, 장르 불문하고 작품보다 더한 수식과 은유까지 곁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유독 그 정도가 심한 작업이 있다. ‘옻’이다. 30∼40회씩 칠하고 말리기를 거듭하는 인고가 ‘유난스러워’서다. 한끗 차로 독이 되고 약이 되는 성향이다 보니 그 앞에선 감히 내 성질을 고집할 수도 없다.
한 해 통틀어 몇 번 만날 수도 없는 그 작업이, 그것도 공예품에나 등장해 ‘낡은 전통’으로 제쳐뒀던 그 작업이, 전혀 다른 형체를 입고 불현듯 세상에 나온 것은 2014년. 나무판에 꽉 들어찬 그림으로 말이다. 단순히 회화로만 볼 것도 아니었다. 옻칠 그림 위에 자개를 얹고 보석까지 박아냈으니까. ‘부조 같은 그림’이어서 드물었고, ‘보석을 품어낸 그림’이어서 희귀했다.
어찌 됐든 지난 7년여의 과정이 참 고단했을 법도 한데, 지치질 않나 보다. 그 성과에 안주할 만도 한데, 그게 또 안 되나 보다. 2014년 이후, 해외를 제외하고 국내서만 다섯 번째인 개인전에 또 그 ‘완성’을 내보였다. “실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옻 그림 작가 채림(58).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옻, 삶의 한가운데’ 전은 그이의 실험이 정점에 오른 작품 144점을 건 자리다. 옻칠에 기반을 둔, 멈추지 않는 고안이 만든 조형적 실험 말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선 한층 ‘현대미술작가’다운 면모를 드러냈는데, ‘지태칠’이란 옻칠의 한 기법을 선뵌 거다. “한지로 만든 오브제에 점성과 접착력이 강한 옻칠로 마감하는 것을 지태칠이라 한다”는 설명이 따라나왔다. 화면의 어느 한 부분에 오톨도톨 박힌 심지가 보이는데, 때론 두꺼운 때론 얇은 한지를 밀고 접고 때려 ‘변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흙의 움직임을 포착한 듯한, 나무뿌리가 엉킨 채 땅 위로 치고 오른 듯한 입체감. 이 꿈틀대는 연작에 작가는 ‘대지’(2021)란 타이틀을 붙였다.
작가 특유의 ‘보석을 입힌 옻’은 연작 ‘꿈결 같은’(2018), ‘바람 부는 풍경’(2018), ‘꽃이 피는 풍경’(2018), ‘하늘, 바다 그리고 시’(2020) 등에 실어냈다. 진주·은·산호·비취·호박·터키석·자개 등을 올렸는데 이 귀한 보석들은 한 그루 나무 몸통과 줄기로(‘꿈결 같은’), 오묘한 푸른빛 바다에 흘러가는 바람으로(‘하늘, 바다 그리고 시’),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르는 산등성이로(‘바람 부는 풍경’ ‘꽃이 피는 풍경’) 그 변신이 자유롭다. 나무와 나눈 대화란 뜻의 ‘수화’(2018·지름 48㎝) 연작 17점은 보석 중 보석이라고 할까. 산·숲의 축소판이라 할 동그란 나무판에 꽃과 풀, 나무를 보석으로 심어냈는데, 전시작의 일부를 떼어내 디테일로 꾸린 듯한 구성미가 도드라진다.
“내 이름에 들어가는 수풀림(林) 때문인가 보다. 나무와 풍경, 숲을 작업하며 나를 담는다고 여긴다.” 그 흔한 나무와 풍경, 숲이지만 작가의 그것은 누구도 들인 적 없는 ‘청정’ 그 자체다.
사실 그이는 ‘보석디자이너 채림’으로 더 오래 살았다. 독특한 장신구 디자이너로 이름도 알렸더랬다. 각종 공모전과 콘테스트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잘 나가던 보석디자이너가 왜 굳이 방향을 틀었을까. “아무데서나 편하게 등장할 수 없는 내 주얼리가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케 하고 싶어서”였단다. “자식 같은 작품들이 잠깐 빛을 본 이후 혹여 도난이라도 당할까 어두운 금고 속에 갇혀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는 거다.
사실 작가가 전통에 눈뜬 건 옻 작업을 하기 이태 전쯤이다. 전통 장신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산호·호박·비취 같은 보석을 끌어들인 거다. 여기에 ‘자개’는 ‘작가의 한 수’였다. 그 장신구를 꺼내놓을 바탕을 궁리하는 단계서 옻칠이 가장 먼저 떠올랐단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옻의 주요한 성질 중에 ‘접착성’이 있다. 무엇을 갖다 붙여도 착 끌어안아 마치 태생이 한몸인 듯한 형체를 만드는데. 작가가 가장 잘 다루는 보석을 달아낸 것이 무모한 일만은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대가가 지독한 ‘팁’이었다. 흔히 ‘옻 오른다’는 육체적 고초까지 감수해야 했으니.
“신의 눈물이라고 한다. 옻은 옻나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보내는 수액이라 채취할 수 있는 양이 적다. 그러니 작업도 고되고.” 그 ‘신이 눈물’을 짜내는 일이 어떨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 수려한 자태를 위해 파닥거리는 백조의 발길질이 이보다 험할까. 그렇다고 쉽게 멈출 발길질도 아니지 않은가. 전시는 13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노인은 야간·고속도로 운전 못한다"…'조건부 면허' 도입 시동
- '무패 챔피언' 메이웨더, 그는 왜 유튜버와 복싱 대결을 할까
- 조국 "내 딸, '2억짜리 벤츠' 아닌 '현대 아반테' 탄다"
- 머스크 장난 트윗질에 암호화폐시장 출렁…해커집단 "기대하라" 경고
- 홍준표 "대구 백신 사기 의혹, 권영진 왜 직접 나서서 홍보했나"
- “나라 위해 지뢰밭 오갔는데, 현실은 月 44만원”…참전용사들의 눈물
- 法 "'회식 참석했다 사망' 부사관에 유족연금 지급하라"
- 트럼프 페이스북 계정 2년 정지…트위터는 영구정지
- [국회기자24시] ‘사면曺가’ 송영길
- 확찐자·코로나비만 신조어까지 등장... 비만 이겨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