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에 물음표를 던진 소녀의 등장..오정희 '중국인 거리'

김지선 2021. 6. 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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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이 시간 기다리는 분들 많으시죠.

생존 작가들의 소설 50편을 선정해 매주 한 편씩 소개해드리는 연중기획 '우리 시대의 소설'입니다.

오늘(6일) 4번째 순서로, 오정희의 단편 '중국인 거리'를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혹독한 성장통을 겪는 10대 소녀를 통해 견고한 가부장적 질서에 짓눌리고, 그러면서도 치열하게 시대를 살아내는 여성들을 조명했습니다.

소재 뿐 아니라 수려한 문체로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아온 작품, 김지선 기자가 소개해드립니다.

[리포트]

[‘중국인 거리’ 中 : "해안촌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리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10살짜리 아이가 가족과 함께 이사 온 곳.

낯선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 인천 '중국인 거리'입니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땅.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모여 이웃이 된 마을.

이곳에서 자란 소녀의 성장통을 그린 작품,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입니다.

유년 시절을 인천에서 보낸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오정희/소설가 : "'내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항상 거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이 '중국인 거리'도 저의 성장기로 그렇게 썼던 것 같습니다."]

소녀가 본 세상은 황폐하고, 냉혹합니다.

앞집 사는 '양공주' 매기 언니는 미군의 폭력에 목숨을 잃고, 엄마는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죽을 것처럼 보이는 데도 여덟 번째 아이까지 임신한 데다, 동생에게 남편을 뺏긴 할머니는 중풍을 앓다 세상을 떠납니다.

[오정희/소설가 : "제도라든가 습관이라든가 가치관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상당히 가부장적인 것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받는 억압은 더 컸을 것이고... 이런 것들이 그 시절하고 그렇게 크게 다를까요?"]

이 영민한 소녀는 그래서 아이를 낳는 여성의 '동물적인 삶'을 동정하는 동시에 서서히 여성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몸이 당혹스럽고 두렵습니다.

["인생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불우하고 누추한 세상에서도 묵은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오르듯 아이는 부단히 애쓰며 한 뼘씩 성장해 지금과는 다른,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오정희 작가는 수려한 문체로 꼼꼼히 수를 놓듯 아이의 혹독하고 외로운 성장통을 담담하게 그렸습니다.

[우찬제/문학평론가 :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인 작품이라고 얘기되고 있어요. 여성 문제에 대해서 '이게 뭐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라고 근본적인 첫 질문을 던지게 된 것, 이런 것은 오정희가 새로운 분기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온 여성 작가들이 '우리는 오정희한테서 나왔다'는 자기 고백을 하고,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될 이유입니다.

[오정희/소설가 : "(이 주인공을 다시 만난다면 혹시 건네주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보통 '꼭 안아주고 싶어' 이렇게 말하겠지만 저는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 봐. 네 마음대로 가 봐. 많이 슬퍼하고 많이 아파하고 그래도 괜찮아...'"]

KBS 뉴스 김지선입니다.

촬영기자:조승연 류재현/그래픽:김현갑/아역배우:이다혜/사진제공:인천시교육청 화도진도서관

김지선 기자 (3rdlin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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