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공부 뜻 못 편 '아버지 꿈' 대신 이루고 싶었죠"

강성만 2021. 6. 6. 18: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짬】10년 걸려 ‘한서열전’ 번역 신경란 작가

중국에서 저술가이자 번역가로 활동 중인 신경란 작가. 신경란 작가 제공

저술가이자 번역가인 신경란씨는 올해로 중국살이 21년째다. 베이징에서 7년을 살았고 그 뒤로는 난징에서 머물고 있다. 재작년과 작년에 두 도시에 대한 격조 있는 인문학 탐사서 <풍운의 도시, 난징>(이하 보고사)과 <오래된 미래도시, 베이징>을 내기도 했다.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 월간지 <샘이깊은물>에 다니고 출판사도 운영했던 그는 금융위기 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2001년 초에 8살과 6살 된 두 아이와 함께 중국에 갔다. 그는 2008년에 난징대 중문과 석사과정에 들어갔고 딸과 아들도 지금 같은 대학에서 중문학과 중국사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어릴 때부터 공부한 고문을 더 읽고 싶어 하던 일을 접고 중국 유학을 떠났죠.” 지난 1일 ‘줌’으로 만난 신 작가의 말이다. 그는 최근 10년 가까이 번역에 매달린 <한서열전>(민음사)을 두툼한 3권의 책으로 펴냈다. 다 합쳐 3600쪽이 넘는다. 사마천 <사기>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사서로 꼽히는 <한서>는 유방이 기원전 206년 한나라를 창건한 이후 200년 가까운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신 작가는 <한서> 100권 중 열전에 해당하는 70권을 옮겼다.

신경란 작가가 10년 걸려 번역한 <한서열전>

그는 자신의 중국행은 전적으로 조부와 부친의 길을 따른 것이라고 책 후기에 썼다. 무학이었지만 딸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는 게 많았던 아버지는 맏딸의 말문이 트이기 바쁘게 천자문부터 가르쳤다. 이삼십대를 중국에서 보내 중국말도 능했던 할아버지는 맏손녀에게 큰소리로 글을 읽는 방법을 가르쳤단다. “아버지가 헌책방에서 구해온 고문을 제가 읽다 막히면 할아버지께서 풀어주셨어요.”

그가 2008년에 민음사와 계약하고 시작한 <한서> 번역에는 중국 고대 문학과 중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두 자녀의 도움이 컸단다. 요즘은 결혼하고 독립한 아들과 온라인으로 명나라 유민 왕부지의 <독통감론>을 함께 읽고 있다. “딸과 아들이 학부에서는 영문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원 진학 때 전공을 바꿨어요. 둘 다 지금 전공을 좋아해요.”

딸과 아들 모두 중국에서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단다. “처음에 중국 학교를 보냈는데 학교에서 못 움직이게 한다고 아이가 힘들어하더군요.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도 걸렸고요.”

두 아이 모두 한국의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해 14살에 난징대로 진학했다. “베이징대 등 다른 대학들은 다 아이들이 어리다고 응시 자격조차 주지 않았는데 난징대만 특별 응시 기회를 주었어요. 영문과를 지망한 딸이 구술 시험에서 <논어> 구절을 줄줄 암송하는 것을 보고 이런 언어 감각이라면 영문학 공부도 잘할 것 같다며 입학을 허가해 주었죠. 중국에 가자마자 아이들에게 <논어>를 큰 소리로 외우게 한 게 결과적으로 입시에 도움이 되었죠.”

왜 굳이 조부와 부친의 길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경북 의성의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난 조부는 선비의 삶을 사셨어요.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너무 점잖은 분이었죠. 두 어른 다 가난했지만 글 읽은 분들답게 자존감이 높으셨어요. ‘어려워도 비굴하게 살지 않는’ 분들이었죠. 어른들이 펴지 못한 꿈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중국 유학을 떠났죠. 생활력이 있으셨던 어머니의 지원도 큰 도움이 됐죠.”

<한서>는 대략 2200년에서 2000년 전 중국 이야기다. 그가 두 자녀의 도움으로 번역을 마무리한 것처럼 아버지 반표가 시작한 편찬 작업을 아들 반고와 딸 반소가 이어 완성했다.

텍스트로서 <한서>의 가치를 묻자 그는 “중국 최초의 관찬 기전체 사서다. 동아시아 문화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지금도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중앙집권형 행정 체제와 관료제가 2200년 전에 정착됐어요. 진나라 멸망 후 권력을 잡은 항우는 중앙집권형 군현제 대신 지방분권형인 봉건제를 택했어요. 하지만 항우를 꺾은 유방은 군현제를 택합니다. 특히 <한서열전>에는 군현제를 받치던 관료 인사 시스템이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수많은 인물의 삶이 담겼어요. 한나라가 도입한 공무원 근무 평가제도에 따라 공무원의 승진과 좌천을 결정하는 과정도 볼 수 있어요. 당시 공무원 평가는 공문서에 근거해 비교적 공정했죠. 우리한테 선물 같은 기록이죠.”

어릴 때 조부·부친한테 한문 배워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았던 어른들”
‘샘이깊은물’ 기자·출판사 운영하다
30대 후반에 두 아이와 중국 유학
셋 다 난징대에서 중국사·문학 공부

“관료제 등 동아시아 문화 원형 담겨”

2천 년도 넘는 역사에서 지금 배울 게 뭐냐고 묻자 그는 공립학교 시스템을 거론했다. “한나라 때 공립학교가 처음 선보입니다. <한서열전>에는 공립학교 선생을 했던 최고의 학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공자도 한나라 때라면 공립학교 선생을 했을 겁니다. 지금 한국처럼 사립과 공립이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라 공립 중심이었죠. 요즘 돈이 없으면 교육을 제대로 못 받고 안정된 일자리도 못 구하잖아요. 2천 년도 더 전에 공립학교 제도를 도입한 취지를 돌아봐야죠.”

그는 책 후기에 “번역 내내 <한서> 저자에게 이메일을 쓸 수 없어 몹시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뭘 묻고 싶었을까? “어려운 구절의 정확한 뜻이죠. 묻는 김에 제가 가진 의문도 풀고 싶었고요. 2011년에는 전한 9대 황제로 27일 재위하다 쫓겨난 해혼후 무덤이 발굴되었어요. 27일 동안 천 가지 넘는 잘못을 했다고 <한서>에 나오지만 유물을 보면 그는 공자의 열성 팬이자 지식인이었어요. <논어>를 비롯해 엄청난 양의 서적과 공자 화상이 그려진 칠기 병풍까지 나왔어요. 해혼후 관련 기술이 관찬사서의 편집방침이었는지 묻고 싶었어요.”

이번 번역 과정의 즐거움에 대해 묻자 그는 “기록에는 거짓이 있을 수도 있지만 죽간에 어렵사리 남겨둔 귀중한 사료를 대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고 답했다. “한나라에 이르러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던 시대에서 벗어나 안전한 사회로 들어갔어요. 직전인 기원전 3세기 때만 해도 진나라 군대는 46일 동안 식량이 끊겨 굶주림에 떨고 있던 조나라 군사 45만 명을 단박에 생매장했어요. 한나라에 와서는 그런 대규모 살육이 줄어들어요. 초한전쟁을 마칠 무렵 1300만 명이었던 인구가 한나라 말기에는 6300만 명까지 늘어나고 생산력도 높아지죠.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제가 사는 자유롭고 안전한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감사해요.” 그는 “한나라는 행정 통계의 왕국이었다”면서 말을 이었다. “인두세를 거두기 위해 철저하게 인구를 조사했고 또 평민 모두에게 20등급의 작위를 주어 소속감을 가지게 했어요. 노비는 10분의 1에 불과했고 중산층이 두꺼웠어요. 신분 이동도 가능했죠. 아주 옛날이란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그가 난징에서 처음 살던 동네는 항우가 죽은 곳에서 불과 몇 ㎞ 떨어졌단다. “역사 현장에서 사는 게 중국사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시절 항우가 건너지 않고 자결했던 반대편 강기슭에는 시인 이백이 달과 함께 놀던 채석기가 있습니다.”

<한서열전>에는 400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누구를 최고로 꼽냐고 하자 그는 유방의 꾀주머니 장량을 들었다. “번역 중에 딸이 누가 가장 멋지냐고 묻더군요. 주저하지 않고 장량이라고 했죠. 그는 한마디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았던 인물이죠. 사적인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았죠. 사실 유방만 해도 재물 취득이 혁명의 큰 목적이었어요. 하지만 진나라에 망한 한(韓)나라 귀족 출신 장량은 가산을 털어 독립 전쟁에 나섭니다. 진시황 암살도 시도했죠. 그러다가 유방 쪽에 가세합니다. 조국을 되찾을 방편으로요. 그러나 초한전쟁 승리 후 유방이 군현제로 방향을 잡자 조국의 부흥이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즉각 자신의 꿈을 접고 한나라 치국 이념에 부응합니다. 유방을 꿰뚫어 본 그는 논공행상에서 굳이 궁벽한 작은 고을을 달라고 합니다. 큰 땅을 차지하면 자신도 언젠가 토사구팽(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당하리라고 본 거죠. 한신처럼요. 지혜로운 사람의 끝판왕이 바로 장량입니다.”

신경란 작가가 재작년에 펴낸 <풍운의 도시, 난징>

그는 2007년부터 살고 있는 난징을 두고 “싫증 나지 않는 도시”라고 말했다. “큰 강과 산이 있어 공기가 좋아요. 1000만 명의 대도시라도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지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많아요. 친구 사귀기 좋죠. 손권의 오나라가 도읍한 3세기부터 10개 나라의 수도로 이어져 와 저절로 역사 공부를 시켜주는 곳이죠. 유적지가 너무나 많아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아요. 싫증을 쉽게 내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딱 맞는 도시입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하나만 말해달라고 하자 답이 이렇다. “공산 정권이라 대만 쪽보다 고문 연구가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그렇지도 않아요. 문화대혁명 등 엄청난 박해의 시기를 이겨내고 고문을 연구한 학자들의 감동 스토리가 많아요. 그런 고난을 뚫고 축적한 고문 연구의 두께가 있어요. 현재 대륙과 대만 학자들이 어떤 장애도 없이 학술 교류를 하는 것이 가장 부럽고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