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의 외주화

이승준 2021. 6. 6. 17: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프리즘]

정의당 충남도당과 충남 지역 50여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4일 공군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충남 서산 공군 20전투비행단 앞에서 병영문화 개선과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고인이 된 피해자를 애도하며 비행단 정문에 국화를 꽂고 있다. 서산/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이승준ㅣ사건팀장

전투체련(전투체육)의 날. 모든 게 낯선 군 생활 초기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투라는 표현에 훈련의 하나인 줄 알았지만 축구나 족구를 하는 시간임을 이내 알게 됐다. 그러려니 했지만 체육 활동과 ‘전투’의 조합은 늘 어색했다. 군 생활을 할수록 이러한 이물감을 자주 느꼈다. 제초·제설 작업, 급식, 회식 등 군인 본연의 임무라기보다는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일들에 ‘전투’, ‘작전’, ‘군 기강’ 같은 표현들이 언제나 따라붙었다. ‘군인정신’이라는 말이 남발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대는 원래 그래”라는 말에 속으로만 삼켰다.

병사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시대에 오래전 기억을 꺼낸 건 최근 공군에서 한 부사관이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서다. 가해자들은 업무와 상관없는 지인과의 술자리에 부하를 불렀다. 술자리 뒤에 성추행이 벌어지고, 가해자와 주변 상관들이 사건을 덮으려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공군 학사장교로 3년여를 군에서 보냈다. 이번 사건을 보면 적어도 군 간부들 사이의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것 같다는 기시감에 시달린다. 15년 전 직접 겪거나 보고 들으며 생겼던 의문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밤늦게 잔뜩 취한 상급자가 차로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는 건 ‘지휘’일까?’ ‘중사가 하사에게 개인 심부름을 수시로 시키는 건 ‘상명하복’의 영역일까?’ ‘갓 임관한 하사에게 폭언을 쏟아붓는 건 군 기강을 확립하는 일일까?’ 이 모든 질문은 ‘군대라는 특수성’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흩어지곤 했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하급자들에게 그런 지시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선에서 쉽게 타협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돌아보면 그때의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은 ‘갑질’, ‘직장 내 괴롭힘’이었어야 한다. 남은 군 생활이나 장기복무 심사, 진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급자와 이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하급자들의 처지가 ‘업무상 위력’이란 말 대신 ‘군 기강’이란 말로 포장됐을 뿐이다.

고인이 성추행을 신고한 뒤의 군의 대응은 ‘갑질’,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을 개념화하고 대책을 마련해온 사회적 합의(군 밖의 조직에서도 여전히 문제가 심각하지만)와 동떨어져 있다.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회식 참석 강요 금지’(248조의2), ‘피해자에 대한 부당한 압력이나 회유, 소문 유포 등 행위 차단’(244조②), ‘가해자와 피해자의 일체 접촉 금지’(244조③) 등의 매뉴얼(부대관리훈령)은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 군형법에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에 대한 조항이 없기도 하다.

부대관리훈령에서 규정하는 ‘성폭력의 정의(241조의1): 성폭력이란 성을 매개로 하여 군 기강 문란, 부대단결 저해, 군 위상 실추를 초래하는 행위로써 성범죄, 성희롱, 그 밖에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한 행위’라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성추행 신고 뒤 군 인사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보다 ‘군 기강 문란’, ‘부대 단결 저해’, ‘군 위상 실추’라는 표현을 더 눈여겨본 것은 아닐까.

2018년 국방부는 ‘장병들은 본연의 전투임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제초·청소 업무를 2021년까지 민간에 단계적으로 외주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 부실급식 논란으로 ‘급식 외주화’도 거론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은 과거에 그랬듯 몇가지 대책을 발표하고 내부적으로 군 기강을 강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 조직을 지탱해온 군기가 달라진 사회와 병영문화에서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사회구성원 모두 느끼고 있다. ‘군기’라는 말도 달라진 시대에 걸맞게 재정의해야 할 때가 왔다. 군 기강도 민간 영역이 적극 개입하는 ‘외주화’가 필요할지 모른다. 이미 많은 장병들은 시민단체 군인권센터나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소원수리’의 외주화를 꾀하고 있다.

gamj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