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 우울증을 두 발로 밟아나가다

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2021. 6. 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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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달콤한 말', 정영훈 기자
정영훈 기자의 신간 '살아있다는 달콤한 말', 모요사 제공
무겁게 가라앉았다. 보통 투병기하면 힘든 투병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는 밝은 내용이 많았는데 이 책은 첫 장부터 우울했다.

신간 '살아있다는 달콤한 말'(모요사)'의 저자는 잘 생긴 외모에,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명문고교와 대학을 나온 뒤 잘 나가는 방송기자가 됐지만 우울의 깊은 늪에 빠졌다. 몸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어느 날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고 존재가 없어졌다. 암막 커튼을 치니 뇌에 커튼이 처졌다. 그제서야 정신과를 예약했고 '일어나 걸어라' 했던 의사의 말은 기적처럼 그에게 치유가 됐다. 걷기에서 달리기, 마라톤으로 그는 우울을 밟고 일어서나갔다.

달리기는 자전거 타기보다 더 깊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평지나 내리막에서 관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전거는 인생의 여정과는 사뭇 다르다. 달리기는 단 한 걸음이라도 직접 힘을 쓰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삶은 그리고 달리기는 한 톨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없다. 두 다리는 체인이 아니라 몸통으로 연결돼 있다. 달리기로 좁힌 것은 나와 나 사이의 거리였다.
-34~35쪽

하지만 2년 뒤 몸이 아픈 것을 알게 됐다. 2018년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은 것. 그는 혈액암 중의 하나인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이라는 최종 진단을 받았다. 모두 6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죽음이 코앞이었다. 처음엔 절망했고 분노했다. 다음엔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자책했다. 그러면서 친구를,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암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모았고, 환우들과 고통을 함께 나눴다.

'복'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병에 걸린 것도 다른 의미에서 복일지 모르겠다. 삶을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물론 생존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184쪽

항암 치료를 끝내고 후유증에서 좀 벗어났을 때쯤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예전만큼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이젠 그런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운동의 효과는 분명했다. 우선 숨쉬기부터 편해졌다. 달리기는 두 번이나 구원의 동아줄이 되었다. 우울증에서, 그리고 항암 극복에서.
-267쪽

'왜 아팠을까?'

암 진단을 받고나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되뇌이는 질문이다. 저자인 정영훈 기자는 한 마디로 화가 쌓였던 것 같다고 했다. "네. 그래" 대신 "아니요. 안 돼"를 달고 살았으면 우울증도 암도 생기지 않았을 것 같다고 돌아봤다. 책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아프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누구 또는 무엇 때문에 병이 생겼을까 등등. 결론은 '내 탓도 남 탓도 아니다'였다"고 전했다. 그는 "병은 죄가 아닙니다. 고치고 다시 살아가면 됩니다. 글을 쓰면서 한 발 떨어져서 나를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치병이 승리와 패배의 문제가 아닌 삶의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알리고 나누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1년차 현직 기자인 그는 기자직에 대한 소회도 털어놨다.

기자라는 직업이 요즘 사회에서 그다지 좋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낼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점은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 한계다.
-292쪽

크게 아프고 나서야 다시 삶이 생겼다. 회사에서 몸과 마음을 떼어냈다. 병이 가져다준 선물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명함에서 앞뒤 수식어를 빼고 이름만 남긴 것. 그것의 소중함 말이다.
-269쪽

아프면 가장 깨닫게 되는 가족들의 귀한 사랑도 담담히 써내려갔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계속 살아야지."
태어나서 들어본 말 중에 가장 고마운 말이었다. 가장 강한 말이었다.
-296쪽

항암과 방사선 치료 등을 통해 현재 눈에 보이는 암은 없는 상태인 그는 '암 대사치료' 카페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의학용어가 가득한 그 어려운 논문도 번역해 올리고 환우들의 질문에도 상세하게 답해준다. 책에도 '암 대사치료'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했다. 암세포의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에서의 대사적 특성을 역으로 이용해 암이 살기 힘든 미세 환경을 만드는 치료 방법인데 쉽게 말해 암을 '굶어죽게' 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치료되지는 않더라도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와 병행하면 암이 살기 힘든 환경을 만들 수 있기에 암 치료에 보다 효과적일 수 있고 항암이 끝난 뒤에는 재발을 막을 수도 있다는 논리다. 참고 도서 몇 권도 소개했다.

사는 것은 힘들다. 아픈 것은 더 힘들다. 아플 때는 그동안 해온 모든 고민이 다 무(無)가 된다. 그렇게 없어질 고민에 왜 그토록 매달렸던 걸까. 하지만 병에서 벗어나면 이내 다시 생의 괴로움에 빠진다. 속세의 인간이라 별수 없다. 이 또한 받아들인다.
-303쪽

암을 경험한 이는 몸에 암이 남아 있는지와 상관없이 평생 암의 노예가 된다. 불안의 노예.
-289쪽

책 전반에는 암 진단을 받고, 그가 느낀 감정과 갖가지 생각들을 담담하면서도 생생하게 담아냈다. 첫 장은 무거웠지만 읽을수록 따뜻해졌고 밝아졌고 가벼워졌다. 마음의 병인 우울증을 극복하고, 몸의 병인 암을 잘 다스리며 다시 얻은 귀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같은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우들에게 큰 힘을 준다. 정영훈 기자는 "좌충우돌입니다. 격한 기쁨을 느끼다가도 침잠하고 견뎌야 합니다. 고요하다가도 휘몰아칩니다. 밝게 빛나다 이내 사그라듭니다. 삶이 그렇더라고요. 안정이라는 말과의 거리를 좁히기가 참 어렵습니다. 받아들이고 살고 있습니다. 행복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임을 아프면서 느꼈습니다. 다시 걷고 있습니다. 함께 걸어요"라고 독자들에게 말했다.

정영훈(46) 기자는 대원외고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KBS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국제부 등을 거쳐 디지털뉴스팀장으로 일했다. 현재는 문화복지부에서 교육행정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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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cinspain@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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