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지킨다는 군대가 여군 부사관조차 지키지 못했다 [박수찬의 軍]
국민 여론이 악화하자 군 당국은 국방부 검찰단, 조사본부, 감사관실을 투입해 공군본부 군사경찰단 등을 압수수색하며 총력 수사에 나섰다.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은 사건에 책임을 지고 4일 사의를 표명했다.
수십만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군대에서 사건 사고나 부조리가 ‘제로’일 수는 없다.
문제는 이를 대하는 태도다. 피해자나 진정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같은 측면에서 한국군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이 중사 사건 공개 직후 국방부와 공군이 취한 대응의 일부라도 사건 직후 신속하게 이뤄졌다면 이 중사의 극단적 선택은 막을 수도 있었다.
군 내 부조리 적발 및 예방 장치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고, 민간 사회 수준의 병영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외부에 문제가 노출되어야 대책이 쏟아지는 패턴은 여전하다.
◆외부에 노출되면 ‘뒷북 대응’
언론 보도나 외부인 등을 통해 사건이 알려지면, 군 당국의 수사 또는 대응 속도가 빨라진다. 이후 종합대책이 나온다. 한동안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또다시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국방부의 서슬 퍼런 대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7년 해군본부에서 여군 대위가 상관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에는 공군 제19전투비행단 군사경찰 간부가 여군 숙소에 침입해 신체와 속옷을 불법 촬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건을 수사하는 군사경찰대가 ‘제 식구 감싸기’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공군은 부랴부랴 사건을 공군본부 중앙수사대로 이관했다.
계급 위주의 상명하복 사회인 군 조직에서 초급 간부나 병사는 약자다. 인권침해 등 부조리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같은 제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이들은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외부에 제보하는 것을 더욱 쉽게 한다.
장병들이 부실급식 문제를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제보해 국방부가 종합대책을 내놓은 것처럼, 사회적 공론화는 고질적인 ‘제 식구 감싸기’에 맞설 방법이라는 사실을 장병들은 잘 알고 있다.
이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돼 군 내 부조리가 외부로 터지면 군의 대국민 신뢰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군의 자정능력이 마비됐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는 격이기 때문이다. 간부들은 매일 수시로 SNS를 모니터하고, 장병들은 군 조직을 불신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잘못된 온정주의, 사건을 은폐하려는 전근대적 인식 등을 하루빨리 타파하고 부조리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문화를 국방부부터 일선 부대에 이르기까지 조기에 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인권침해에도 말 못하는 여군 부사관들
군에서 부사관은 장교보다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 군 내에서 소수인 여군 부사관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조직 내 소수 인력에 대한 검은 양(black sheep:희생양 개념으로 어떤 조직에서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는 3일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열린 제3차 대한민국 집현포럼 정책세미나에서 “여군 개개인이 느끼는 차별은 제도적 차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시와 거리두기, 편향적 인사평가, 심지어는 왕따현상도 있다”고 말했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장병 15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부사관 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군 부사관 중 성희롱을 당했거나 목격 또는 소문을 들었다고 응답한 사례는 61건에 달했다. 남자 부사관(30건)의 두 배가 넘는다.
조사에 응했던 여군 부사관 중 한 명은 “보건휴가를 사용하려 했을 때 지휘관이 ‘지금은 생리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해 수치스러웠다”고 말했다. 다른 부사관은 “부대 규정에 의해 여군 (부사관)들은 머리망 사용을 강요당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침해가 발생해도 여군 부사관들은 문제 제기를 꺼린다. 실태조사에서는 인권침해 대응방법으로 ‘참고 지나간다’고 응답한 사례가 156건으로 전체 여군 부사관 응답의 74.3%에 달했다. 이유로는 ‘부대가 시끄러워질까봐’(28.1%) ‘시정요구가 소용없음’(21.6%) 등이 꼽혔다.
이를 두고 문제를 제기했다가 자신이 유무형의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휘관이 직접 조치를 취하는 대신 선임부사관이나 참모 부서에 인계하면,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이 타인에게 알려질 위험이 높아진다.
문제가 확대되거나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고자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을 설득하려 하고, 문제 제기자를 질책하기도 한다.
이번 사건은 여군 부사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군 내 부정적 대응을 한데 모은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수사기관과 일부 지휘관만 알아야 할 이 중사의 피해 사실을 비행단 내 관계자들은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으며, 상관들은 이 중사에게 엄격한 절차를 요구해 이 중사가 압박을 받았다고 유족 측은 전했다. 결국 이 중사는 전속 5일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지금의 군 조직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여군 초급 간부들은 인권침해와 회유, 은폐, 2차 가해의 위협에 노출된 채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유족의 신뢰에 부응할 마지막 기회를 군 당국은 놓쳐선 안된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군대는 존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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