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지킨다는 군대가 여군 부사관조차 지키지 못했다 [박수찬의 軍]

박수찬 2021. 6. 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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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욱 국방부 장관이 2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국군의무사령부 장례식장 접견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성남=연합뉴스
군 내 성폭력이 또다시 발생했다. 성추행을 당한 공군 여성 부사관 이모 중사가 회유와 2차 가해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국민 여론이 악화하자 군 당국은 국방부 검찰단, 조사본부, 감사관실을 투입해 공군본부 군사경찰단 등을 압수수색하며 총력 수사에 나섰다.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은 사건에 책임을 지고 4일 사의를 표명했다. 

수십만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군대에서 사건 사고나 부조리가 ‘제로’일 수는 없다. 

문제는 이를 대하는 태도다. 피해자나 진정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같은 측면에서 한국군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이 중사 사건 공개 직후 국방부와 공군이 취한 대응의 일부라도 사건 직후 신속하게 이뤄졌다면 이 중사의 극단적 선택은 막을 수도 있었다.

군 내 부조리 적발 및 예방 장치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고, 민간 사회 수준의 병영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외부에 문제가 노출되어야 대책이 쏟아지는 패턴은 여전하다. 

◆외부에 노출되면 ‘뒷북 대응’ 

언론 보도나 외부인 등을 통해 사건이 알려지면, 군 당국의 수사 또는 대응 속도가 빨라진다. 이후 종합대책이 나온다. 한동안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또다시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군 성폭력이 대표적 사례다. 2014년 여군 부사관을 성추행한 육군 장성이 긴급체포돼 충격을 안겼다. 직속 상관의 거듭된 성희롱에 시달린 여군 대위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군 성폭력 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자 국방부는 부랴부랴 근절 대책을 마련했다.
4일 오후 충남 계룡대 정문 모습. 국방부 검찰단은 이날 숨진 공군 부사관의 성추행 피해 사건과 관련해 공군본부 군사경찰단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했다. 계룡=연합뉴스
성추행 및 성폭행 가해자는 ‘원아웃’ 퇴출을 원칙으로 하고 성희롱 가해자는 진급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성추행,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현역 군인은 정직(1∼3개월), 강등, 해임, 파면 등의 중징계를 내려 현역 복무 부적합 심의를 받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국방부의 서슬 퍼런 대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7년 해군본부에서 여군 대위가 상관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에는 공군 제19전투비행단 군사경찰 간부가 여군 숙소에 침입해 신체와 속옷을 불법 촬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건을 수사하는 군사경찰대가 ‘제 식구 감싸기’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공군은 부랴부랴 사건을 공군본부 중앙수사대로 이관했다.  

계급 위주의 상명하복 사회인 군 조직에서 초급 간부나 병사는 약자다. 인권침해 등 부조리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건 당사자 외에 나머지 부대원들이 가해자에게 온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건을 은폐·축소하려 시도할 때, 이들은 2차 피해에 노출된다. 부대 전체가 영향을 받고, 연대 책임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려고 피해자를 희생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정의당 충남도당과 충남지역 50여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4일 공군 여성 부사관 성추행 피해자 사망사건이 발생한 서산 공군 20전투비행단 앞에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고인을 애도하는 뜻으로 정문에 국화를 꽂고 있다. 서산=연합뉴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 수사·감찰·상담 등의 조직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군 내 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에는 개인 신상 보호 등의 피해자 보호책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같은 제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이들은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외부에 제보하는 것을 더욱 쉽게 한다.

장병들이 부실급식 문제를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제보해 국방부가 종합대책을 내놓은 것처럼, 사회적 공론화는 고질적인 ‘제 식구 감싸기’에 맞설 방법이라는 사실을 장병들은 잘 알고 있다. 

이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돼 군 내 부조리가 외부로 터지면 군의 대국민 신뢰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군의 자정능력이 마비됐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는 격이기 때문이다. 간부들은 매일 수시로 SNS를 모니터하고, 장병들은 군 조직을 불신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국민적 불신을 등에 업은 정치권과 시민사회 등에서 “군의 문제를 군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요구가 분출하면, 시민사회의 군 개입 시도가 늘어나게 된다. 이 중사 사건도 민간에 수사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군인권보호관 설치 등의 요구도 나오는 실정이다.
정의당 충남도당과 충남지역 50여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4일 공군 여성 부사관 성추행 피해자 사망사건이 발생한 서산 공군 20전투비행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철저한 수사와 가해자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서산=연합뉴스
이같은 요구가 거듭되면 시민사회가 군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군은 문민통제를 받아들이는 민주주의 민군 관계도 흔들린다. 군이 정치적 영향에 취약해지는 셈이다. 

잘못된 온정주의, 사건을 은폐하려는 전근대적 인식 등을 하루빨리 타파하고 부조리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문화를 국방부부터 일선 부대에 이르기까지 조기에 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인권침해에도 말 못하는 여군 부사관들

군에서 부사관은 장교보다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 군 내에서 소수인 여군 부사관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조직 내 소수 인력에 대한 검은 양(black sheep:희생양 개념으로 어떤 조직에서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는 3일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열린 제3차 대한민국 집현포럼 정책세미나에서 “여군 개개인이 느끼는 차별은 제도적 차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시와 거리두기, 편향적 인사평가, 심지어는 왕따현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군 부사관 인권침해의 가장 큰 내용은 군대 예절이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대할 때 반말과 마구 대하는 태도로써 ‘까라면 까는’ 비틀어진 위계질서를 의미한다”며 “비틀어진 위계질서는 아래 계급으로 갈수록 더 열악한 군 복무 환경을 만든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31일 경남 진주시 공군 교육사령부 대연병장에서 거행된 공군 제146기 학사사관후보생 임관식에서 신임 소위들이 임관 선서를 하고 있다. 공군 제공
여군 부사관의 열악한 복무환경은 성폭력, 인권침해 등 부조리에 노출될 위험을 높인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장병 15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부사관 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군 부사관 중 성희롱을 당했거나 목격 또는 소문을 들었다고 응답한 사례는 61건에 달했다. 남자 부사관(30건)의 두 배가 넘는다. 

조사에 응했던 여군 부사관 중 한 명은 “보건휴가를 사용하려 했을 때 지휘관이 ‘지금은 생리할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해 수치스러웠다”고 말했다. 다른 부사관은 “부대 규정에 의해 여군 (부사관)들은 머리망 사용을 강요당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침해가 발생해도 여군 부사관들은 문제 제기를 꺼린다. 실태조사에서는 인권침해 대응방법으로 ‘참고 지나간다’고 응답한 사례가 156건으로 전체 여군 부사관 응답의 74.3%에 달했다. 이유로는 ‘부대가 시끄러워질까봐’(28.1%) ‘시정요구가 소용없음’(21.6%) 등이 꼽혔다. 

이를 두고 문제를 제기했다가 자신이 유무형의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휘관이 직접 조치를 취하는 대신 선임부사관이나 참모 부서에 인계하면,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이 타인에게 알려질 위험이 높아진다. 

문제가 확대되거나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고자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을 설득하려 하고, 문제 제기자를 질책하기도 한다. 

이번 사건은 여군 부사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군 내 부정적 대응을 한데 모은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지난 3월 회식에 참석하고 귀가 도중 성추행을 당해 신고를 한 뒤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 중사에게 코로나19 방역수칙 위반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상관들이 회유를 했다.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사건 가해자인 공군 장모 중사가 2일 서울 용산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국방일보 제공
이 중사는 부대 이동 요청을 통해 제20전투비행단에서 제15특수임무비행단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수사기관과 일부 지휘관만 알아야 할 이 중사의 피해 사실을 비행단 내 관계자들은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으며, 상관들은 이 중사에게 엄격한 절차를 요구해 이 중사가 압박을 받았다고 유족 측은 전했다. 결국 이 중사는 전속 5일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지금의 군 조직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여군 초급 간부들은 인권침해와 회유, 은폐, 2차 가해의 위협에 노출된 채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을 지녔던 평범한 여군 부사관의 삶이 스러져 가는 동안 군은 수사도 보호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가해자가 아니라 공군이 이 중사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실급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각한 사건”이라는 비판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공군 여군 부사관 이모 중사의 유족측 김정환 변호사(가운데)가 3일 서울 용산 국방부 검찰단 청사 앞에서 사건 은폐 의혹을 받는 부사관들에 대한 추가 고소를 앞두고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족측 변호인 김정환 변호사는 “유족은 고인이 죽어서도 군인이라는 생각이시다. 당장은 군 검찰단을 믿고 수사가 투명하게 이뤄졌으면 하는 것이 유족과 변호인단의 공식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유족의 신뢰에 부응할 마지막 기회를 군 당국은 놓쳐선 안된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군대는 존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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