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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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수편의 시보다 단 한 줄의 소감이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날짜는 시계의 숫자가 자정에서 새벽으로 진입한 지점에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전투대원들이 위급 시에 연이은 불면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색하려는 연구로, 미국 국방부에서 거액을 들여 추진한 것이다.
정보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 체제가 결합한 오늘날에는 온라인에서 시간의 제약 없이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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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크리틱]이주은ㅣ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수편의 시보다 단 한 줄의 소감이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는 표현이다. 나는 이 말이 가끔 초현실적으로 들린다. 자고 나니 확 달라져 있는 낯선 세상에 내가 덩그러니 서 있는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하는 탓이다.
날짜는 시계의 숫자가 자정에서 새벽으로 진입한 지점에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잠을 자고 나야 실질적으로 하루가 넘어간다. 수면을 취한다는 것은 컴퓨터로 치면 전원을 꺼두는 작업과도 같은 것이다. 깨어 있으면 오늘 하던 생각이 멈추지 않고 내일이 오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밤에 자려고 누울 때가 최고로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에 눈을 감기가 살짝 두렵다는 사람도 있다. 아침형이냐 야밤형이냐는 신체의 리듬과 생활습관에 따른 구분이겠지만, 당사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싫건 좋건 오늘은 이미 지나갔다는 태도로 사는 이라면 아침형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야밤형은 준비되지 않은 채 새 아침을 맞기가 싫은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끝자락을 붙잡아 어떻게든 늘이려 한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1908~1963)의 작품 중에 잠과 사투를 벌이는 상황이 있다. 제목이 <불면증>인데, 1947년에 제약회사의 후원을 받아 포스터로 쓰려고 제작한 그림이다. 바로는 젊은 시절 파리로 건너가 초현실주의에 물들었고, 중년 이후부터는 멕시코에 정착했다. 그녀가 죽고 나서 2년 뒤에 열린 회고전에는 멕시코 역사상 최다수의 관람객이 찾아왔을 정도로, 바로는 멕시코인의 사랑을 받았다.
불면증은 오늘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심신으로 내일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괴로운 수면장애이다. 바로는 <불면증>에서 녹색조명이 밝혀진 어지러운 집 안 분위기를 보여준다. 불빛을 향해 집 안으로 이상스러운 곤충이 날아들고 있는데, 전파 소음 같은 왱왱거림이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겹겹이 문이 열리더니 코도 입도 없는 커다란 눈들이 나타나 공중에서 지켜보고 있다. 사방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자신을 주시한다는 기분 때문에 감시받는 이는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인간이 과연 일정 시간 잠들지 않고도 집중하는 것이 가능한지 연구한 프로젝트가 있다. 전투대원들이 위급 시에 연이은 불면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색하려는 연구로, 미국 국방부에서 거액을 들여 추진한 것이다. <24/7 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미국의 조너선 크레리가 이 연구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흰정수리 북미멧새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 철새는 이동 중에 무려 7일 동안이나 밤낮없이 날면서 쉬지 않고 먹이를 찾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4/7이란 흰정수리 북미멧새처럼 ‘하루 24시간 주 7일 내내’를 뜻하는 숫자이고, 잠과 휴식이 불필요해진 항상 깨어 있는 사회를 은유한다. 정보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 체제가 결합한 오늘날에는 온라인에서 시간의 제약 없이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다. 또한 건물마다 골목마다 달려 있는 감시카메라들은 잠들지 않고 도시의 구석구석까지 지켜보는가 하면, 사람들은 휴대폰을 통해 24시간 소통의 장을 열어놓고 있다.
자발적인 불면증 상태, 이것은 진보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처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는 무엇이 과열된 인간을 한번쯤 식혔다 재가동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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