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엔 "국민 의견 들어야"..이번엔 "공감하는 국민 많다"
[경향신문]
한·미 정상회담 때 투자 협력으로 재계와 관계 좋아져
‘본격적 검토 들어갔나’ 관측…불공정 이슈 재점화 우려
문재인 대통령이 2일 4대 그룹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 건의에 대해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고 언급, 문 대통령이 이 부회장 사면을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문 대통령이 코로나19 경제 회복 국면에서 기업의 역할을 부쩍 강조하고 있고,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삼성을 포함한 4대 그룹이 대대적인 대미 투자 보따리로 문 대통령의 방미길에 힘을 실어준 가운데 나온 발언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나 횡령·뇌물 등으로 유죄가 확정된 대기업 총수를 경제 논리를 앞세워 사면해주는 것은 기업 범죄에 면죄부를 주고 사법질서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날 오찬간담회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해준 기업들에 문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이 때문에 간담회 전부터 기업인들이 이 부회장 사면 문제를 꺼낼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먼저 이 부회장 사면 문제를 담은 경제5단체장 건의를 언급하자, 이를 받아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결정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다”고 ‘총수 역할론’을 강조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며 “지금은 경제 상황이 이전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고, 기업의 대담한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 같은 문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사면에 공감한다는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의견을 듣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문 대통령의 발언은 그간 이 부회장 사면론에 대해 밝혀온 입장과 비교하면 온도차가 확연하다.
문 대통령은 올 1월만 해도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도 지난 4월 이 부회장 사면론에 대해 “현재까지 검토한 바 없으며, 현재로선 검토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이후 지난달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선 “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서 판단하겠다”며 “지금 반도체 경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어서 우리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쟁력을 더욱더 높여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여지를 두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이날 오찬간담회에선 기업·경제계가 갖는 고충 및 역할을 동시에 언급했다는 점에서 사면 쪽으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업의 앞서가는 결정이 없었다면 오늘이 없었다”며 기업인들을 치켜세웠다. 이 부회장의 형기는 내년 7월까지로, 재계 안팎에선 광복절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에 대한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경제 논리를 내세워 사면을 단행할 경우 사법정의 파괴라는 지적과 함께, 여권에 치명상을 안겼던 ‘불공정’ 이슈도 다시 불거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뇌물·배임·횡령 등 5대 중대 부패범죄에 대해 사면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참여연대·민변 등 시민단체들은 이날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투자의 정치적 대가로 이 부회장 사면·가석방이 논의되는 것에 반대한다”면서 “이 부회장 사면·가석방은 재벌총수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며, 사법질서의 근간을 훼손한다는 점에서도 부당하다”고 밝혔다.
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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