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하고도 힘찬 '글씨 예술'을 보다


■ 서예 정통파 김충현 탄생 100년… 백악미술관서 특별전
한글·한자에 두루 능했던 대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궁체부터
한국적인 漢字 예서까지 섭렵
이희승 시집 ‘박꽃’ 표지 제목도
삼성그룹 제호·김구 비문도 써
“현대 서예 나아갈 방향 남겼다”
“우리 서예의 근본을 지키며 자신의 예술을 새롭게 만들어낸 정통파(正統派)였지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에 대해 이동국 서예평론가(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다. 김충현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반기며 이 평론가는 “서예가 지금은 그 위상을 많이 잃었으나,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중을 중심으로 정통파들이 크게 활약했다”고 되돌아봤다.
일중은 우리 서예의 전통을 지켜내며 그 중심(中心)을 단단히 일신(日新)해낸 인물이었다. 전통과 실험, 추상과 전위 작품까지 유행한 근현대 서예사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통파로, 한글과 한자(漢字)에 두루 능했다. 그는 한글 서예에서 한글 고체(古體)를 만들어 고판본을 서체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였다. 한자 서예에서는 전(篆), 예(隸), 해(楷), 행(行), 초(草)의 각종 서체를 혼융해 독자적인 서풍(書風)을 세웠다.
소전(素筌) 손재형(1903∼1981), 소암(素菴) 현중화(1907∼1997), 검여(劍如) 유희강(1911∼1976), 강암(剛庵) 송성용(1913∼1999) 등이 그와 함께 20세기 한국 서예의 큰 봉우리를 이뤘다. 그의 동생인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도 정통파 대가로 꼽힌다. 여초가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 한국 서예의 맥을 찾으려 했다면, 일중은 한글에서 그 정체성을 찾고 현대적으로 계승·발전시켰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가 오는 8일부터 7월 6일까지 서울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여는 특별전 ‘一中, 시대의 중심에서’는 그의 예술 세계 전모를 조명한다. 기념사업회 측은 “일중의 서예는 우리 근현대사의 격랑과 서구 미술 침범 속에서 이뤄졌다”며 “그의 글씨와 함께 근현대 서예 100년을 돌아본다는 데 특별전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전시는 5부로 나눠 작품 197점을 선보인다. 1부 ‘서예에 눈뜨다’에서는 일중이 서예 공부를 시작하며 접한 자료들과 해방 이전 작품들을 살펴본다. 일제강점기 그의 서예는 한자의 유현(幽玄)한 매력을 깨달아가는 과정과 궁체를 통해 민족의식을 이어가고자 한 결의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1938년 중동학교 1학년 때 쓴 한글작품은 그 뚜렷한 보기다.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한글로 풀어쓰면서 조선 시대 궁체 서법을 충실히 따랐다. 1942년, 22세의 나이에 교본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쓴 것은 우리 서예계에 전설로 남아 있다.
2부 ‘일중의 한글서예, 변화의 중심에 서다’에서는 해방 후 그의 한글 서예를 살펴본다. 한글 고체로 동상명(銅像名)과 비문에 웅장함을 더했고,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시가(詩歌)들을 선정해 그 운율을 다양한 서체로 담아냈다. 한자 예서체 느낌의 한글 훈민정음 판본체를 최초로 창안해 초·중등 교과서의 모범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3부 ‘서체의 혼융, 일중체(一中體)를 이루다’는 그의 한자 서예를 서체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 일중을 대표하는 한자 서체는 예서(隸書)다. 그의 예서는 다양한 서체의 묘미를 녹여냈고, 특히 한글 서예의 특징이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서법이다. 1987년 작 ‘삼연 시(三淵 詩)’에서처럼 그의 후기 작들은 하나의 서체로 특정할 수 없는 자유로운 필법을 보인다. 4부 ‘제호(題號)와 비문(碑文)’은 서예가 사회와 함께 호흡했던 시절을 느끼게 한다. 조풍연 수필집 제호 ‘청사수필(晴史隨筆)’을 박래현의 그림에 붙여 쓴 것, 이희승 시집 ‘박꽃’을 천경자 그림과 함께 쓴 것 등은 문학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일중은 비문 글씨로도 유명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백범 김구 선생의 비문, 충남 온양역 앞 충무공 기념비, 삼성그룹 로고 ‘三星’ 등이 그의 작품이다. ‘수정아파트’ ‘천마콘크리트’ 등의 글씨는 한국 근현대사 일면을 비춘다.
마지막 5부 ‘일중과 사람들’엔 동료 서예가인 유희강뿐만 아니라 화가 김기창, 서세옥과 조각가 김경승, 소설가 박종화 등 다양한 예술가가 등장한다.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장우성 화백이 중등 교과서 편찬을 위해 일중의 작품을 빌려 쓰고 돌려준다는 내용의 편지글은 실용문임에도 당대 예술인들의 멋스러움을 그윽하게 전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현일 백악미술관 관장은 “일중의 작품들을 살피면서 온후한 인품이 절로 드러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일중의 아들인 김재년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아버님은 매사에 균형 있는 사고로 중심을 잡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고 되돌아봤다. 일중은 술친구가 많았으나 대취한 적은 없고, 사회 각 분야 인물들과 폭넓게 교우했으나 지위를 내세워 거들먹거리는 사람은 멀리했다. 화선지 조각 하나도 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로 절약했고,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서예 대가면서도 가훈(家訓)을 만들지 않았고, 아들과 딸이 글씨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기본만 가르쳐주고 스스로 깨치라고 했다. 김 이사장은 “전시를 보는 분들이 자기중심을 귀히 살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10월 제주 소암기념관에서도 열린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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