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지원단체 후원이 '가해자 감형용' 상품인가요?

임재우 2021. 5. 3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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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금 후원 내용을 정리하던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닻별(활동명) 활동가는 진이 빠졌다.

성폭력 가해자가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피해자지원단체에 기부를 하려다 뒤늦게 발각되는 일들이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닻별 활동가는 "한달에 신규 후원자가 20∼30명 정도 늘어나는데 그 중 2∼3명이 성폭력 가해자나 그 가족"이라며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이 알려진 뒤 후원자가 많이 늘어난 뒤에는 '면피 기부'를 따로 가려내기 힘들어 별도로 집계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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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금 후원 내용을 정리하던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닻별(활동명) 활동가는 진이 빠졌다. 이번달 새로 들어온 10여명의 신규 후원회원 중 3명의 후원비 200여만원을 돌려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닻별 활동가는 연말정산 기간이 아닌 때에 영수증을 요청하는 신규 후원자는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다. 추궁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다가 결국 “(성폭력 관련) 재판을 받고 있다”거나 “(성폭력)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번에 돌려보낸 후원금도 그런 경우였다.

성폭력 가해자가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피해자지원단체에 기부를 하려다 뒤늦게 발각되는 일들이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2015~2017년 전국 126개의 상담소에서 성폭력 가해자가 후원한 사례는 101건에 이른다. 닻별 활동가는 “한달에 신규 후원자가 20∼30명 정도 늘어나는데 그 중 2∼3명이 성폭력 가해자나 그 가족”이라며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이 알려진 뒤 후원자가 많이 늘어난 뒤에는 ‘면피 기부’를 따로 가려내기 힘들어 별도로 집계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난 5~6년 사이 일부 재판부가 피해자지원단체에 후원금을 낸 피고인이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며 형을 깎아주는 일들이 이어지면서 ‘면피 기부’가 유행처럼 번졌다. 지난 2015년 5월 서울서부지법은 휴대전화로 피해자의 신체를 몰래 불법 촬영한 뒤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ㄱ씨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정기적으로 기부까지 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벌금 200만원 형의 선고를 유예했다. 2016년 8월 의정부지법은 200여 차례에 걸쳐 불특정 다수의 치마 속을 불법 촬영한 ㄴ씨가 “가정폭력 및 성폭력상담소에 1000만원을 기부해 속죄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인다”며 징역 6월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2018년 7월 대전지법에서도 “한국성폭력상담소에 400만원을 기부했다”는 이유로 지하철에서 다수의 피해자를 강제추행한 ㄷ씨에게 벌금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기도 했다.

성범죄 피해자지원단체들이 감형을 목적으로 한 후원은 받지 않겠다고 처음 공론화한 지 4년이 지났다. 지난 2017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후원금 납부를 근거로 재판부가 형량이 깎아준 사례를 모았고, 이런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기자회견도 했다. 지난해 2월에도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성폭력 피고인들의 ‘꼼수 기부’가 성행하고 있다. 가해자의 ‘반성 여부’를 감경요소로 남발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냈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를 여럿 대리해온 한 변호사는 “실제로 최근 디지털 성범죄가 적극적으로 공론화된 최근 1∼2년 사이 재판부가 피해자지원단체 지원을 이유로 형을 깎아주는 일들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하지만 성범죄 가해자를 주로 전담하는 변호사 업계에서는 여전히 반성문·탄원서 제출과 함께 피해자지원단체 후원을 ‘감형 전략 패키지’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변호사들이 내세우는 감형 전략 패키지는 기부금 영수증을 비롯해 반성문과 주변인 탄원서, 봉사활동 증명 등을 포함한다. 성범죄 관련 가해자들이 재판 전략을 공유하는 한 온라인 카페에는 최근에도 “양형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피해자 지원단체에) 후원을 시작했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닻별 활동가는 “감형 목적의 패키지성 양형자료가 가해자를 위한 상품처럼 취급되는 ‘시장 구조’가 가장 큰 문제다. 재판부뿐 아니라 일부 변호사 업계의 각성도 필요한 상황”이라고 짚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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