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신분증에 불어·영어 동시 표기, “시대 변화” “언어 굴복” 논란
프랑스 정부가 새로운 신분증에서 프랑스어와 영어를 나란히 표기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평소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이 큰 시민들은 “영어의 침투를 막아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29일(현지 시각)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오는 8월부터 프랑스 정부가 보급할 예정인 새로운 국민 신분증(주민등록증 개념)에는 프랑스어와 영어가 나란히 표시된다. 이름은 ‘prénoms/given names’라고 하고, 출생지는 ‘lieu de naissance/place of birth’라고 표기하는 방식이다. 신분증이라고 하는 표현도 프랑스어(carte nationale d’identité)로 쓴 다음 영어(identity card)로 나란히 썼다. 프랑스어를 앞에, 영어를 뒤에 쓴다. 영어는 이탤릭체로 표시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어 위상이 낮아진다며 불만을 표시하는 여론이 상당하다. 소셜 미디어에는 “앵글로색슨에 대한 굴복” “언어를 둘러싼 항복”과 같은 표현이 등장했다.
저술가인 로랑 에르블레는 일간 르피가로에 기고문을 보내 “프랑스어가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고 영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정부가 강조해야 한다”며 “영어 병기를 포기하라”고 주장했다.
2019년 등장한 새로운 수도권 교통카드인 ‘나비고 이지(Navigo Easy)’도 영어로 돼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프랑스인들이 아직도 꽤 있다.
프랑스어 전통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1994년 제정된 이른바 ‘투봉법’이 유명무실해졌다며 프랑스어를 보호하는 입법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투봉법은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크 투봉의 이름을 딴 것으로, 모든 정부 문서와 상업용 거래 문서 등에서 프랑스어만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한 법률이다.
그러나 영어 사용이 점점 흔해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 신분증 영어 병기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법 있다. 소셜 미디어에는 “해외에 자주 나가는 사람에게는 영어 표기도 해줘야 신분증 사용이 편리해진다” “다국적기업에서 일하는 프랑스인이 많은데 그들에게 프랑스어만 쓰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등의 반응이 나온다.
신분증 영어 병기 논란을 다룬 르피가로 기사의 댓글 중에는 “프랑스어는 끝났다. 할머니랑 대화할 때 쓰기 위한 언어”라는 거친 표현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상에서 영어를 쓰는 이가 제법 많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영어로 페이스북 글을 띄우거나 영어 강연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프랑스인 중에서는 마크롱이 예전 대통령들과 다르게 영어를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다. 마크롱은 올해 초 EU 정상회의에 참석했을 때 프랑스어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코로나 예방 백신을 영어로 ‘백신(vaccine)’이라고 발음했다가 서둘러 프랑스어로 ‘박생(vaccin)’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EU에서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영어의 위상이 낮아진 게 아니라 오히려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브렉시트로 EU 27회원국 가운데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는 아일랜드와 몰타뿐이며, 두 나라를 합친 인구는 EU 전체 4억4500만명 중 1.2%에 그친다. 하지만 여전히 EU집행위원회에서는 영어로 회의를 하고 EU 회원국 정상들끼리 만났을 때도 영어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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