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수줍은 환대, 외면했던

한겨레 2021. 5. 3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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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전동차의 앞 발판에 할머니를 쪼그려 앉혀 태우고 큰 차들 가득한 출근길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더위에 어찌 이리 걸어가시나 했더니, 아침 일찍 수백미터 떨어진 밭에 나와 일하다 그만 시간이 그리되었는지 몰랐고, 걸어가는데 글쎄 아무도 차를 세워주지 않더라, 분심 없이 명랑하게 말씀하셨다.

시선 처리를 도무지 할 수 없을 때는 안개 낀 이른 아침 비좁은 골목을 채 빠져나가기 전 상자를 한가득 주워 끌고 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마주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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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정나리 ㅣ 대구대 조교수

1인용 전동차의 앞 발판에 할머니를 쪼그려 앉혀 태우고 큰 차들 가득한 출근길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시속 15㎞가 넘을 리 없는 노부부의 질주는 늘 퀭하던 내 아침 얼굴에 실소를 자아내며 생기를 불어넣었다. 차선을 제대로 무시할 뿐 아니라 다른 차들이라곤 안중에 없던 운전곡예를 보고자 내심 그들의 출현을 고대하였다.

멀리서는 ‘전원’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들을 볼 때면 기분이 좋다 못해 통쾌했고, 늘 그들을 응원했으나, 부부의 사정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나를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냥 전동차 옆을 쌩하니 지나가는 무자비한 차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그들을 볼 수 없었고,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다니시던 우리 외할머니가 쇠약해져 시설에 소속되었듯, 수년 전의 그 부부도 지금은 아마 동력을 잃지 않으셨을까 짐작한다.

언젠가 한여름 땡볕 아래 인적 드문 도로변을 위태로이 걸어가는 할머니가 있어 차를 세웠다. 이 더위에 어찌 이리 걸어가시나 했더니, 아침 일찍 수백미터 떨어진 밭에 나와 일하다 그만 시간이 그리되었는지 몰랐고, 걸어가는데 글쎄 아무도 차를 세워주지 않더라, 분심 없이 명랑하게 말씀하셨다. 물 한잔하고 가라셨지만 나는 갈 길이 바쁜 척했다.

시선 처리를 도무지 할 수 없을 때는 안개 낀 이른 아침 비좁은 골목을 채 빠져나가기 전 상자를 한가득 주워 끌고 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마주칠 때이다. 또다시 나는 당연한 듯 길을 점령하는 자동차의 얼굴을 하고 있고, 얼리버드 할아버지 할머니는 외려 미안해하며 어렵게 길 한쪽으로 비켜주신다. 동네의 분리수거가 비공식적으로 어느 정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역시 짐작만 한다. 상자에 종이와 병을 담아 버리러 갔던 어느 날에는 할아버지가 멀찍이서 내가 재활용 쓰레기를 어서 두고 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동네 놀이터에는 아이들보다 할머니들이 더 많이 모여 있을 때가 있지만 ‘노령’인구와 삶의 패턴이 다른 상대적 ‘젊은이들’은 서로에게 유령 같은 존재감으로 비가시화되기 일쑤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들은 이렇게 파편적이었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시선이 비켜갈 때가 더 많았다. 장터 밖 인도에 홀로 앉아 손끝이 새까매지도록 고구마 줄기 껍질을 까서 파는 할머니가 “새댁, 하나 사 가”라며 올려다봐줘도 난 집에서 밥을 좀체 안 해 먹으니 사드릴 수가 없었고(할머니는 어찌 새댁이 밥을 안 해 먹냐, 여름에 고구마 줄기 반찬 안 하는 새댁이 당최 어딨냐는 표정이었다), 뜨거운 솥에다 비닐로 꽁꽁 감싸놓은 옥수수를 파는 시장 할머니의 눈길도 외면하였다(먹고는 싶었지만 환경호르몬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놀이터 앞을 지나가는 날 발견하고 ‘저기 트럭에 뭐 파는지 좀 물어봐달라’ 부탁하는 할머니에게 붕어빵이 2천원, 다코야키가 3천원이라 가격표를 읽어드리는 게 우리가 만나는 유일한 접점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과제의 일부로 야심 차게 계획했던 노인복지센터에서의 봉사학습 활동이 코로나 때문에 대폭 축소되었다며 학생들이 울상을 지었다. 애써 준비한 프로그램 대신에 화단 가꾸기와 외부 청소만이 허용되어 쭈뼛쭈뼛했는데 어르신들이 먼저 말을 걸고 반겨줘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었다 하였다. 학생들의 이야기에 찡긋, 껄껄 웃어주시고, 화단에 심은 마거리트와 데이지를 보고 좋아하시더라 했다. 그제야 난 그동안 동네 주민들인 우리의 제한적이고 안타까운 조우에서도 늘 그들이 먼저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두 팔 벌린 ‘환대’를 시도해주신 거였단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응답’은 언제나 환대의 너그러움과 용기에 미치지 못해 미약하게 미끄러지고 말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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